조선야담

빚문서를 태워 버린 가난한 선비와 궤짝 속에서 나온 붉은 장부

지은미소 2026. 10. 28.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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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 내 은 백 냥을 떼먹고 네놈 딸년을 온전히 시집보낼 줄 알았더냐!"

늦가을 찬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던 한양 마포나루의 허름한 주막 앞, 한 사내가 피투성이가 된 채 흙바닥을 구르고 있었더랍니다. 사내의 어린 딸은 멱살을 잡은 채 몽둥이를 휘두르는 건장한 장정들 앞에서 그저 목놓아 울부짖을 뿐이었지요.

길바닥에 던져진 은자 백 냥

때는 조선 인조 임금 시절, 마포나루 근처 삼개골에는 이지함의 후손이라 자처하는 선비 이윤호가 살고 있었습니다. 허름한 도포에 갓마저 올이 풀려 남루하기 짝이 없었으나, 이 선비의 눈빛만은 맑은 샘물처럼 형형했지요. 그는 과거 공부보다는 천하의 이치와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보살피는 데 뜻을 둔 인물이었습니다.

그날도 이 선비는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줄 요량으로 선친이 물려준 유일한 유산인 조그만 밭뙈기를 팔아 품에 쥐고 오던 길이었습니다. 길가에서 행패를 부리던 자는 마포나루에서 악명 높은 고리대금업자 배만호였지요. 배만호는 가난한 뱃사공 김씨가 빌린 쌀 세 섬을 은 백 냥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자로 부풀려 그의 열네 살 난 여식을 기생집에 팔아넘기려던 참이었습니다.

"멈추시오! 대명천지에 백주대로에서 어찌 이런 패악을 부린단 말이오!"

이 선비가 가로막아서자, 배만호가 침을 탁 뱉으며 쏘아붙였습니다.

"웬 거지 같은 선비 놈이 참견이냐? 네놈이 이놈 빚 은 백 냥을 대신 갚아줄 배짱이라도 있더냐?"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 선비는 품속에서 하얀 무명천에 싼 보따리를 꺼내 길바닥에 던졌습니다. 밭을 팔아 손에 쥔 딱 백 냥의 은덩이였지요.

"여기 백 냥이 있소. 그러니 저 사내의 차용 증서를 내어놓고 당장 썩 물러가시오!"

불길 속으로 사라진 빚문서

배만호는 번쩍이는 은자를 보자 눈이 뒤집혀 재빨리 품에서 낡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던져주고는 은자를 챙겨 달아났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뱃사공 김씨는 땅바닥에 엎드려 통곡하며 이 선비의 신발 코를 붙잡았지요.

"나리, 나리! 이 은혜를 어찌 갚습니까! 제 목숨을 거두어 종으로 부려 주십시오!"

이 선비는 허허 웃으며 김씨를 일으켜 세우고는 품에서 부싯돌을 꺼냈습니다.

치익, 불꽃이 튀더니 배만호에게서 건네받은 빚문서 모서리에 불이 붙었더랍니다. 종이는 순식간에 붉은 불길에 휩싸여 재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지요.

"빚이란 갚을 길이 없을 때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는 족쇄요. 내 이제 그 족쇄를 태웠으니, 그대는 그저 딸아이와 함께 떳떳하게 사시오."

김씨는 말문이 막힌 채 눈물만 흘리더니, 가슴팍 깊은 곳에서 손때가 시커멓게 묻은 손바닥만 한 붉은 가죽 주머니를 꺼내 내밀었습니다.

"나리, 드릴 것이 이것밖에 없습니다. 작년에 풍랑을 만나 침몰한 명나라 상선에서 건져 올린 것인데, 글귀를 몰라 품고만 있었습니다. 제발 이것이라도 받아 주십시오."

이 선비는 사양하려 했으나 김씨의 간절한 눈빛을 이기지 못해 주머니를 건네받아 도포 자락에 쑤셔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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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령 땅에서 날아든 뜻밖의 부름

밭을 팔아치운 이 선비의 집안 꼴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끼니를 잇지 못해 맹물로 배를 채우는 날이 늘어갔지요. 그러던 어느 날 밤, 사립문 밖에서 거친 숨소리와 함께 누군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문을 열어보니 비단옷을 입은 낯선 노복 하나가 서 있었지요. 황해도 재령의 제일가는 거상, 한도경 대방이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나리, 저희 대방 어르신께서 급히 이윤호 나리를 뵙고자 청하십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나귀에 실려 재령의 거대한 저택에 도착한 이 선비는 병풍 뒤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는 노인과 마주했습니다. 노인의 곁에는 험상궂은 얼굴로 눈을 부라리는 사내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마포나루에서 은자를 뜯어갔던 배만호였습니다.

"어르신! 이런 뜨내기 선비를 무엇하러 부르셨습니까? 장삿길은 제가 다 알아서 처리할 텐데요!"

배만호가 툴툴거리자, 병석의 한 대방이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닥치거라! 네놈이 내 조카라는 이름표를 달고 그간 내 뒤에서 어떤 짓거리를 해왔는지 내 모를 줄 아느냐!"

한 대방은 이 선비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선비님, 마포나루에서 뱃사공 김씨를 구해준 일이 참말입니까? 밭 판 돈 백 냥을 던져주고 그 자리에서 빚문서를 태웠다는 것이 사실이오?"

"그렇습니다만, 그것이 이 자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궤짝 속 붉은 장부와 거상의 비밀

한 대방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벽장을 가리켰습니다.

"배만호 저놈이 내게 보고하기를, 김씨라는 뱃사공이 내 배 한 척을 통째로 침몰시키고 도망쳤다 하여 수탈을 일삼았소. 헌데 선비님, 김씨에게서 혹 무슨 물건을 받지 않으셨소?"

이 선비는 문득 그날 뱃사공 김씨가 건네준 붉은 가죽 주머니가 떠올라 품속에서 꺼내놓았습니다. 그러자 배만호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며 사시나무 떨듯 떨리기 시작했더랍니다.

주머니 속을 열자 나온 것은 명나라 상선에서 나온 귀물이 아니라, 붉은 먹으로 암호 같은 숫자가 빼곡히 적힌 '비밀 거래 장부'였습니다.

"이, 이것은…!"

한 대방이 장부를 펼쳐 들고 배만호를 매섭게 쏘아보았습니다.

"네놈이 바다에 빠져 침몰했다던 그 비단 배는 침몰한 것이 아니었다! 왜관의 왜상들에게 몰래 밀수출하고 내게는 배가 난파했다고 거짓을 고한 뒤, 그 죄를 무고한 김씨에게 씌워 그 일가까지 파멸시키려 했던 것이지! 뱃사공 김씨는 배가 가라앉을 때 네놈의 선실에서 이 장부를 목숨 걸고 빼내 품에 감추고 있었던 게야!"

김씨는 글을 몰라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은인에게 쥐여주었으나, 그것이야말로 배만호의 만행을 증명할 결정적 물건이었던 것입니다.

"저놈은 장부를 찾으려고 김씨를 핍박했던 것이고, 선비님은 아무 대가 없이 목숨을 살려주고 문서를 태워버림으로써 하늘의 천벌을 이끌어내신 것이오!"

배만호는 변명 한마디 못 한 채 관아의 포졸들에게 오라를 받아 끌려나갔습니다.

맺으며

한 대방은 그 자리에서 이 선비의 청렴함과 담대한 배포를 높이 사, 배만호가 가로챘던 상단의 전권과 수만 냥의 자금을 맡기며 상단을 이끌어 달라 간청했더랍니다. 밭을 팔아 남의 빚을 대신 갚아주었던 가난한 선비는 훗날 의리를 밑천 삼아 한양과 송도를 주름잡는 대거상으로 이름을 떨쳤지요. 남의 불행을 씻어준 맑은 마음이 결국 스스로의 앞길을 비추는 등불이 되었으니, 참으로 세상의 인과응보는 묘한 법입니다.

혹 여러분도 길을 걷다 우연히 베푼 작은 온정이 생각지도 못한 큰 복으로 돌아왔던 신기한 이야기를 알고 계시는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한밤중 도적 떼를 제 발로 찾아가 은 열 냥을 빌려달라 청한 간 큰 과부의 비밀.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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