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뎅— 뎅— 뎅—.
종루에서 울려 퍼지는 스물여덟 번의 인정(人定) 종소리가 어두워지는 한양 도성의 밤공기를 사정없이 갈랐더랍니다. 도성의 사대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히고, 길가에 나앉았던 장돌뱅이와 백성들은 잡히면 곤장 신세라며 제 집을 향해 바람처럼 내달렸지요.
어둠 속을 달리는 봇짐

때는 숙종 8년, 한양 피맛골 골목 어귀에 숨을 헐떡이며 달리는 청년이 하나 있었습니다. 중인 신분의 혜민서 말단 참봉이자 약방을 운영하던 온순하고 성실한 성격의 배도훈이었지요.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몹쓸 돌림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홀어머니에게 달여 드릴 백두산 삼(蔘)을 무사히 집까지 들고 가는 것이었더랍니다.
하지만 인정 종은 이미 마지막 쇠북 소리를 토해 낸 뒤였고, 도성은 쥐 죽은 듯 적막에 휩싸였습니다. 이제부터 파루(罷漏)를 알리는 서른세 번의 북소리가 울리는 새벽까지는 꼼짝없이 경범(更犯), 즉 야간 통행금지를 어긴 대역죄인 취급을 받아 포도청에 끌려가 곤장을 맞아야 할 처지였지요.
"제발 어머니 약만 전해 드리고 가겠소! 조금만 늦추어 주시오!"
도훈은 혼잣말로 빌며 골목을 꺾었으나, 저 멀리서 딱따기 소리와 함께 붉은 순라등을 든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더랍니다.
포교의 탐욕과 억울한 누명

"게 섰거라! 인정이 지난 지가 언젠데 밤길을 쏘다니느냐!"
횃불을 비추며 나타난 이는 좌포도청 소속의 악명 높은 포교, 마만식이었지요. 그는 야간 순찰을 핑계로 밤눈 어두운 백성들을 털어먹기로 소문난 탐욕스러운 자였더랍니다. 마만식은 도훈의 봇짐을 사정없이 낚아채더니, 그 안에서 귀한 삼 뿌리와 은자 세 냥을 발견하고는 눈을 번뜩였습니다.
"허허, 통행금지를 어긴 것도 모자라 도둑질한 장물까지 품고 있구나. 이건 대갓집에서 훔친 것이 틀림없다!"
"아닙니다, 나리! 제 어머니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습니다. 종로 약계에서 돈을 모아 정당히 산 삼입니다!"
도훈이 눈물로 호소하며 매달렸으나, 마만식은 비열하게 웃으며 발길질을 해댔지요.
"네놈의 핑계는 옥골에서 듣겠다. 순순히 옥에 갇히든지, 아니면 이 귀한 삼을 두고 조용히 꺼지거라!"
마만식은 도훈을 억울한 절도범으로 몰아 삼을 가로채려 했던 것입니다.
몸싸움 끝에 쥐어쥔 패
도훈은 눈이 뒤집혔더랍니다. 지금 이 약을 뺏기면 어머니는 내일 아침 파루가 울리기도 전에 숨이 끊어질 터였습니다.
"이건 제 어머니 목숨입니다! 절대로 못 줍니다!"
도훈은 바닥에 뒹굴며 마만식의 허리춤을 붙잡고 격렬하게 늘어졌지요.
"이 미친놈이 관헌을 능멸하느냐!"
마만식이 쇠몽둥이를 치켜든 순간, 도훈은 필사적으로 그의 옆구리를 들이받고 삼 봇짐을 낚아채 어두운 골목으로 내달렸습니다. 어둠 속에서 마만식의 허리춤에서 무언가 툭 끊어지며 도훈의 손에 쥐어졌으나, 돌아볼 겨를도 없었지요.
"저놈을 잡아라! 군관을 공격한 흉악범이다!"
순라군들의 고함과 호각 소리가 야심한 밤을 찢어발겼습니다. 도훈은 피를 흘리며 미로 같은 피맛골 처마 밑에 숨어 거친 숨을 몰아쉬었더랍니다. 품에서 떨어진 것을 손에 쥐어 보니, 묵직하고 모가 난 흑단목 호패였습니다. 바로 마만식의 이름과 포도청 직책, 그리고 뒷면에 관인(官印)이 선명히 박힌 관원의 호패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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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종루 앞의 역전
골목골목마다 순라군이 깔려 개미 새끼 한 마리 빠져나갈 수 없었습니다. 도훈은 어머니의 약을 전하기는커녕 날이 밝으면 살인 미수범으로 효수될 위기에 처했지요. 그러나 도훈은 호패 모서리에 깊게 패어 있는 붉은 인주 자국과 뒷면에 새겨진 은밀한 각인을 보고 무언가를 깨달았더랍니다.
'이건 평범한 포교의 호패가 아니다. 관청의 무기고를 여는 비밀 패(牌)가 함께 엮여 있구나!'
평소 혜민서에서 관아 문서를 자주 접했던 도훈은 그것이 며칠 전 도성 안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군기시 은괴 도난 사건'의 열쇠임을 단박에 알아챘습니다. 마만식이 장물아비와 결탁하여 군기시 무기고의 빗장을 열어주고 챙긴 뒷거래의 증표였던 것이지요.
이윽고 새벽 네 시경, 어스름한 안개 속에서 파루를 알리는 서른세 번의 종소리가 웅장하게 울리기 시작했더랍니다.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순간, 마만식은 부하들을 이끌고 종루 앞 광장으로 뛰어나오는 도훈을 향해 칼을 빼 들었습니다.
"네놈이 감히 순라군을 치고 도망쳐? 여기서 명줄을 끊어주마!"
도훈은 피하지 않고 품에서 호패와 함께 삐져나온 붉은 비단 주머니를 높이 쳐들며 목청을 높였습니다.
"종사관 나으리! 여기 순찰을 돌며 무기고를 털고 백성을 겁박한 진짜 도적놈의 증좌가 있습니다!"
마침 파루 종소리에 맞춰 교대를 위해 종루 앞에 나와 있던 포도청 종사관과 수십 명의 군관들이 일제히 그 자리에 멈춰 섰더랍니다.
숨겨진 죄와 드러난 진실
"저게 무슨 소리냐! 멈추어라!"
종사관이 호통을 치며 다가왔고, 마만식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지요.
"나, 나으리! 저놈은 야행을 저지르고 저를 덮친 미치광이입니다!"
마만식이 당황하여 변명했으나 도훈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습니다.
"어젯밤 인정이 지난 뒤 약을 구하러 가던 저를 겁박하여 이 호패를 흘렸습니다. 보십시오! 이 호패 뒤에 묶인 쇠고리는 군기시 창고 자물쇠를 여는 관철(官鐵)이며, 주머니 안에는 도난당했던 호조의 은괴 조각이 들어 있습니다!"
종사관이 호패와 붉은 주머니를 낚아채 확인하자, 과연 사라졌던 관청의 은괴 파편과 마만식의 이름이 새겨진 비밀 패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더랍니다.
"마만식! 네놈이 순찰을 핑계로 밤마다 도성 안을 제집 드나들듯 하며 도적질을 일삼았단 말이냐!"
종사관의 불호령이 떨어졌고, 마만식은 무릎을 꿇으며 사시나무 떨듯 떨었지요.
"사, 살려주십시오! 나으리, 한 번만 눈감아 주십시오!"
현장에서 오랏줄에 묶인 악질 포교 마만식은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포도청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더랍니다.
맺으며
종사관은 도훈의 딱한 사정과 효심에 감복하여 그의 경범 죄를 면해 주었을 뿐 아니라, 관마를 내주어 무사히 어머니에게 삼을 전하게 해 주었지요. 정성껏 달인 약을 마신 도훈의 어머니는 며칠 뒤 씻은 듯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고, 배도훈은 도적을 잡은 공으로 포상까지 받아 모자가 내내 평안하게 살았더랍니다. 야간 통행금지의 서슬 퍼런 어둠 속에서도 제 욕심을 채우려던 간신배는 제 꾀에 넘어가 쇠고랑을 차기 마련이니, 참으로 세상 이치는 무서운 법이지요.
혹여 밤길을 걷다 뜻하지 않은 어둠 속에서 진실을 밝혀낸 기이한 사연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보름달 뜨는 밤마다 주막 뒷마당 장독대에서 통곡하던 소복 입은 여인의 정체.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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