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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숨어버린 야심한 시각, 한양 북촌의 고적한 대감댁 사랑방에서 별안간 묵직한 탁자 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더랍니다. 취기가 거나하게 오른 두 노인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서로를 쏘아보고 있었지요.
"이 대감, 내 목을 걸고 장담하건대 그자는 나라의 녹을 먹을 자격이 없는 도둑놈이오!"
"허허, 조 대감. 정승 자리까지 오른 이가 이리 경솔해서야. 내 장담하지요. 내일 날이 밝기 전에 자네가 틀렸음이 밝혀질 것이오."
술상 위의 기이한 내기

숙종 임금 시절, 우의정을 지내는 조태석과 좌의정 이정구는 젊은 시절부터 둘도 없는 벗이었으나 성정은 물과 불 같았습니다. 조태석은 대쪽 같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고, 이정구는 너그럽고 침착하여 사람을 쉬이 내치지 않았지요.
이날 밤 두 정승이 멱살을 잡을 듯 다툰 까닭은 바로 한성부 판윤 배도현 때문이었더랍니다. 배도현은 겉으로는 청렴한 선비 행세를 하며 온갖 미사여구로 조정을 주름잡았으나, 조태석은 그가 뒤로는 군포를 착복하고 뇌물을 긁어모은다는 심증을 굳히고 있었지요. 반면 이정구는 뚜렷한 물증도 없이 조정의 중신을 모함해서는 안 된다며 감싸고돌았습니다.
술기운이 머리끝까지 뻗친 조태석이 마침내 수염을 파르르 떨며 소리쳤습니다.
"좋소! 그렇다면 오늘 밤 그자의 사가로 사람을 보내 당장 뒤져봅시다. 만약 내 말이 틀렸다면 내 우의정 관직을 사직하고 낙향하겠소!"
"허, 진심인가? 그렇다면 난 배도현이 결백할 경우 자네에게 내 아끼는 옥벼루를 주지. 허나 자네 말대로 그자가 탐관오리면 내가 영의정 자리를 마다하고 자네와 함께 봇짐을 싸겠네."
장안의 소리 없는 그림자

두 정승의 명을 받은 이는 이정구 대감 댁의 늙은 집사 천복이었습니다. 천복은 과거 군관 출신으로 발걸음이 고양이처럼 가볍고 눈썰미가 매서운 자였지요. 조태석은 자신의 품에서 묵직한 쇠열쇠 하나를 꺼내 천복의 쥐여주며 낮게 속삭였습니다.
"배도현의 사랑채 뒤편 연못가 헛간 바닥을 들추면 쇠로 감싼 궤짝이 하나 묻혀 있을 것이다. 지난달 그 집에서 쫓겨난 하인이 목숨 걸고 내게 알려준 열쇠니라. 그 궤짝을 통째로 들고 오너라."
이정구는 찻잔을 천천히 돌리며 껄껄 웃었습니다.
"천복아, 주위를 잘 살피되 궤짝에 손을 대기 전에 헛간 문고리에 붉은 노끈이 매여 있는지 먼저 보거라. 그것이 풀려 있다면 굳이 땅을 팔 것도 없다."
천복은 영문을 모른 채 두 정승에게 허리를 깊이 숙이고는 칠흑 같은 밤거리로 쏜살같이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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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구름 아래의 헛간
비라도 쏟아질 듯 바람이 거세진 삼경 무렵, 천복은 배도현의 대저택 담장을 훌쩍 뛰어넘었더랍니다.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오직 헛간 쪽에서만 미약한 등불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살금살금 다가간 천복이 숨을 죽이고 문틈을 엿보았지요. 놀랍게도 헛간 안에는 한성부 판윤 배도현이 비단 도포를 입은 채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의 앞에는 조 대감이 말한 쇠로 감싼 궤짝이 이미 파헤쳐져 널브러져 있었지요.
"흐흐흐, 이 멍청한 것들. 조태석 그 늙은 여우가 내 뒷조사를 하는 줄도 모르고 있었을까 봐."
배도현은 기름진 얼굴로 징그럽게 웃으며 품에서 먹을 듬뿍 묻힌 붓을 꺼내 들었습니다. 궤짝 안에 든 종이 뭉치를 빠르게 훑더니, 조태석의 이름 석 자를 뇌물 수수 명단 맨 윗줄에 적어 넣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 대감을 역적으로 몰아 단칼에 쳐내려는 배도현의 간악한 계책이었던 셈이지요.
궤짝이 품고 있던 진실
천복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헛간 뒤편의 기와를 밟아 소리를 냈습니다. 배도현이 기겁하며 헛간 밖으로 뛰쳐나간 틈을 타, 천복은 헛간 문고리를 보았지요. 과연 이 대감의 말대로 붉은 노끈이 끊어진 채 바닥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천복은 지체 없이 바닥의 궤짝을 통째로 거두어 품에 안고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사랑방으로 돌아온 천복이 흙투성이가 된 궤짝을 두 정승 앞에 털썩 내려놓았더랍니다. 조태석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외쳤지요.
"보시오, 이 대감! 이것이 바로 배도현 그자가 축재한 부정한 뇌물 장부요! 이제 내 말이 맞았음을 인정하시겠소?"
조태석이 떨리는 손으로 궤짝 뚜껑을 열어젖히고 종이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러나 첫 장을 읽어 내려가던 조태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습니다. 거기에는 조태석 자신이 배도현에게 백은 수천 냥을 받고 관직을 팔아넘겼다는 해괴망측한 누명이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내가 배도현에게 뇌물을 받았다니? 날 모함하려는 역모요!"
조태석이 사색이 되어 소리치자, 잠자코 있던 이정구 대감이 빙그레 웃으며 궤짝의 이중 바닥을 툭 쳤습니다.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숨겨진 얇은 칸에서 피처럼 붉은 가죽 장부 하나가 툭 떨어져 나왔지요.
"조 대감, 성질 급한 건 여전하구려. 자네가 하인에게 속아 들고 온 열쇠는 배도현이 미끼로 던져둔 가짜 궤짝의 것이었네. 배도현은 자네가 사람을 보낼 것을 미리 알고, 자네를 옭아맬 가짜 장부를 적고 있었던 게지."
"그, 그렇다면 이 붉은 장부는 무엇인가?"
"내가 며칠 전 배도현의 집안 살림을 도맡던 늙은 행랑아범을 매수해 진짜 장부를 이 비밀 칸에 숨겨두고, 문고리에 붉은 노끈을 묶어두라 일렀네. 배도현이 가짜 장부를 채워 넣으려고 헛간에 들어가 노끈을 끊는 순간, 천복이가 들이닥치도록 유인한 것이지."
이정구가 건넨 붉은 장부를 펼치자, 배도현이 지난 오 년간 군포를 빼돌리고 양민의 땅을 빼앗은 세세한 내역과 뇌물을 상납한 조정 간신들의 이름이 먹물도 마르지 않은 채 적혀 있었더랍니다.
배도현이 판 함정을 한 수 앞서 내다보고 역으로 놈의 목줄을 죌 진짜 증좌를 확보했던 것이지요. 모든 진실을 깨달은 조태석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며 껄껄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내가 자네의 깊은 지혜를 얕보았구려! 내일 아침 어전회의에서 이 장부를 주상 전하께 바치고, 놈의 목을 베어 백성들의 원통함을 풀어줍시다!"
맺으며
다음 날 아침 조회에서 배도현은 붉은 장부 앞에 덜미를 잡혀 의금부로 하옥되었고, 머나먼 변방으로 귀양을 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더랍니다. 밤새 목숨을 건 내기를 벌였던 두 정승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궁궐 문을 나서며 나라를 지탱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지요. 벗이란 이처럼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칼날 같은 위기를 함께 건너가는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혹여 여러분도 벗과 함께 한밤중 뜻밖의 진실을 마주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보름달 뜨는 밤마다 곳간의 쌀이 피로 물든다는 어느 과부 댁의 기괴한 사연이 펼쳐집니다.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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