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야담

칠흑 밤 만석꾼 곳간을 털던 간 큰 도둑이 피 묻은 나막신을 안고 목놓아 운 사연

지은미소 2026. 10. 19.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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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비가 무섭게 쏟아지던 야심한 밤이었습니다. 충청도 공주 고을에서 손꼽히는 부잣집, 윤 진사 댁의 높은 담장을 훌쩍 뛰어넘은 검은 그림자가 있었지요.

그림자의 정체는 인근 장터에서 귀신같은 솜씨로 소문난 좀도둑 박칠복이었습니다. 비명 같은 천둥소리에 발소리를 묻으며 칠복은 단숨에 사랑채 뒤란까지 숨어들었더랍니다.

비 젖은 담장을 넘은 손길

숙종 임금 치세의 일이었습니다. 칠복은 본디 도둑질을 일삼던 자가 아니었으나, 몹쓸 돌림병에 걸린 어린 누이의 약값을 대지 못해 결국 어둠의 길로 들어선 가련한 사내였지요.

칠복이 노린 곳은 대대로 고리대금으로 곳간을 채워 원성이 자자하던 윤두식 진사의 집이었습니다. 윤 진사는 흉년이 들 때마다 피눈물 흘리는 소작농들의 전답을 헐값에 사들이며 재산을 불린 지독한 악인이었지요.

"오늘 밤 쌀 한 섬만 훔쳐 내면 내 누이에게 온전한 탕약을 먹일 수 있을 텐데."

칠복은 처마 밑으로 몸을 바짝 붙이며 떨리는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런데 윤 진사의 호화로운 본채 댓돌 위를 살피던 칠복의 눈에 기이한 물건 하나가 걸려들었습니다. 비단신과 가죽신이 즐비한 화려한 댓돌 한구석에, 썩어 문드러진 낡은 오동나무 나막신 한 짝이 덩그러니 놓여 있던 것이지요.

댓돌 위의 기괴한 흉물

칠복은 슬며시 손을 뻗어 그 낡은 나막신을 집어 들었습니다. 굽은 닳고 닳아 평평해졌고, 끈을 꿰는 구멍 언저리에는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겨 지워지지 않은 검붉은 핏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지요.

"괴이하군. 금송아지도 거느렸다는 윤 진사가 왜 이런 거렁뱅이 신짝을 안마당에 두었단 말인가?"

바로 그때, 대청마루 안쪽 밀실에서 윤 진사와 그의 사병 노릇을 하는 건달 목탁의 으슥한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습니다. 칠복은 나막신을 품에 쑤셔 넣고 숨을 죽였지요.

"진사 나으리, 마곡사 아랫마을의 김 참봉 집 빚 문서는 어찌 처리할까요? 갚을 기한이 닷새나 지났는데 배를 째라며 버팁니다요."

"흥, 배를 째라면 째 줘야지. 십 년 전 그 지독한 소작쟁의 주동자 최만석 놈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잊었느냐? 그놈이 신던 나막신 한 짝을 댓돌에 둔 건, 이 윤두식에게 대드는 놈은 모조리 그렇게 뼈도 못 추린다는 경고란 말이다."

윤 진사의 서늘하고 잔인한 웃음소리가 칠복의 귀를 찢듯 파고들었습니다. 순간 칠복의 온몸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 빳빳하게 굳어 버렸더랍니다.

어둠 속에 드러난 십 년의 한

최만석. 그 이름 석 자가 윤 진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칠복은 품속에 넣은 나막신을 꺼내 들고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습니다.

칠복은 어릴 적 부모를 잃고 떠돌다 열 살 무렵 한 가난한 소작농의 손에 거두어졌더랍니다. 그 의붓아비의 이름이 바로 최만석이었지요. 만석은 흉년에 굶어 죽어 가던 칠복을 자식처럼 품어 주었고, 비 오는 날마다 진흙탕에 발을 다치지 말라며 손수 오동나무를 깎아 나막신을 지어 주곤 했습니다.

"아가, 이 나막신 안쪽 밑창을 보거라. 험한 세상 네 발길 닿는 곳마다 복이 깃들라고 내 손톱으로 복(福) 자를 새겨 두었단다."

칠복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낡은 나막신 안쪽 굽 언저리를 더듬었습니다. 진흙과 묵은 때에 덮여 있었지만, 손끝에 분명히 걸리는 거친 칼자국, 그것은 틀림없는 만석의 손길이 새긴 '福' 자였습니다.

십 년 전, 소작료를 터무니없이 올린 윤 진사에게 항의하러 관아로 가겠다며 집을 나섰던 양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지요. 윤 진사는 만석이 노름빚을 지고 야반도주했다고 소문을 퍼뜨렸으나, 진실은 그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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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잣집 대청마루의 통곡

"으아아악! 아버님, 아버님!"

칠복의 목구멍에서 십 년 동안 억눌렸던 피울음이 기어이 터져 나오고 말았습니다. 곳간을 털려던 좀도둑은 간데없고, 원수의 집 대청 한가운데 주저앉아 피 묻은 나막신을 가슴에 짓이기며 대성통곡을 하는 한 맺힌 아들만 남았지요.

방문이 벌컥 열리며 윤 진사와 목탁이 몽둥이를 치켜들고 뛰어나왔습니다.

"어떤 놈이냐! 감히 뉘 집 안전이라고 들어와 곡소리를 내느냐!"

윤 진사가 삿대질을 하며 호통쳤으나, 칠복은 눈을 부릅뜬 채 품에서 나막신을 번쩍 치켜들었습니다.

"네놈이 윤두식이냐! 십 년 전 내 아버님 최만석을 산 채로 암매장하고, 그 신짝을 거두어 네 악행을 자랑하는 노리개로 삼았더냐!"

윤 진사는 나막신을 보자마자 얼굴이 잿빛으로 변하며 뒤로 주춤 물러섰습니다.

"저, 저놈이 그걸 어찌… 목탁아, 뭣하느냐! 당장 저놈의 주둥이를 찢어 죽여라!"

목탁이 흉포한 기세로 몽둥이를 휘두르며 달려들었지만, 한에 사무친 칠복의 몸놀림은 귀신처럼 날랬습니다. 칠복은 몽둥이를 날렵하게 피해 목탁의 턱주가리를 들이받고, 댓돌 아래로 내동댕이쳤더랍니다.

포도청의 횃불과 밝혀진 백골

그때 담장 너머에서 수십 개의 횃불이 일제히 솟구치며 대문이 부서져라 열렸습니다.

"포청 포졸들이다! 모두 꼼짝 마라!"

공주 관아의 포교와 포졸들이 마당으로 들이닥친 것이었습니다. 낮에 윤 진사의 횡포를 견디다 못해 관아에 탄원서를 냈던 소작인들이, 밤중에 윤 진사 댁에서 괴이한 통곡이 울려 퍼지자 포졸들을 이끌고 들이닥친 것이었지요.

칠복은 꿇어앉아 포교를 향해 피 묻은 나막신을 높이 받쳐 들었습니다.

"나으리, 이 나막신 바닥을 보십시오! 십 년 전 실종되었다던 소작인 최만석의 신짝이옵니다! 윤 진사가 방금 제 입으로 아버님을 해쳤노라 자백하는 것을 이 두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윤 진사는 사시나무 떨듯 떨며 발뺌하려 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놈은 야밤에 담을 넘은 흉악한 도둑놈입니다! 도둑놈의 헛소리를 믿으시면 아니 됩니다!"

그러나 포교는 나막신 바닥에 새겨진 선명한 핏자국과 글귀를 확인하더니 차갑게 명을 내렸습니다.

"윤 진사 네놈의 사랑채 뒤란 대나무 숲을 샅샅이 파헤쳐라! 십 년 전 만석의 시신을 찾지 못해 미제로 남았던 사건이다!"

포졸들이 괭이와 삽을 들고 대나무 숲을 파헤친 지 반 시진도 되지 않아, 흙탕물 속에서 칠복의 나막신과 짝을 이루는 또 다른 나막신 한 짝과 함께 참혹하게 묻혀 있던 백골 한 구가 마침내 세상 밖으로 드러났더랍니다.

맺으며

윤 진사와 그 수하들은 모진 문초 끝에 살인과 사기죄로 교수형에 처해졌고, 부정하게 빼앗겼던 전답은 본래 주인인 가난한 백성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갔습니다. 칠복은 도둑질하려 침입한 죄가 있었으나, 억울한 원혼을 달래고 진실을 밝힌 공을 참작받아 장형 몇 대로 풀려났으며, 관아의 배려로 누이의 약을 지어 완쾌시켰지요.

피 묻은 신짝 하나가 십 년을 건너뛰어 원수를 갚고 은혜를 찾아갈 줄 그 누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여러분은 원한 맺힌 낡은 물건이 주인의 원수를 갚아 준 또 다른 기이한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산적 소굴에 홀로 걸어 들어간 꼽추 노인이 하룻밤 만에 두목의 목을 베고 유유히 걸어 나온 기막힌 계책.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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