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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삼십 년, 늦가을 칼바람이 몰아치던 충청도 옥천 장터의 주막거리였습니다. 낡은 짚신에 해진 무명옷을 걸친 한 사내가 묵직한 거문고를 무릎에 얹고 목청을 뽑아내기 시작했지요.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놋쇠 방울 소리 따라간 우리 아버지는 어디 계시느냐."
사내의 구슬픈 노랫소리가 장바닥에 흩뿌려지자, 지나치던 장돌뱅이들도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노래하는 광대와 사라진 아비

사내의 이름은 길손이라 불리던 박달수였습니다. 본디 경상도 문경의 가난한 소작농 아들이었으나, 열 살 되던 해 앞을 보지 못하던 아비 박 노인이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지요. 달수에게 남겨진 것은 아비가 생전에 불던 구멍 일곱 개 뚫린 대나무 피리와, 그 피리 끝에 매달려 있던 딸랑거리는 작은 놋쇠 방울 하나뿐이었습니다.
"아비는 눈이 멀었어도 소리를 쫓는 귀가 밝았다. 언젠가 내가 길을 잃으면 이 노랫가락을 듣고 찾아오마."
아비가 어린 달수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남겼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달수는 장성하여 서른을 훌쩍 넘긴 마흔의 나이가 되도록, 팔도팔읍 장터를 떠돌며 아비가 가르쳐 준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그 세월이 자그마치 삼십 년이었더랍니다.
비단옷 입은 악공과 만석꾼의 잔치

그러던 어느 날, 달수가 옥천 장터에서 노래를 마치자 비단 도포를 입은 하인 하나가 다가와 은전 두 닢을 툭 던졌습니다.
"네 목청이 제법 처량맞구나. 오늘 밤 우리 조 대감 댁 회갑 잔치가 열리는데, 대감마님께서 구슬픈 노래를 퍽 좋아하시니 와서 한 곡조 뽑아 보아라."
고을의 만석꾼 조창학은 피도 눈물도 없는 구두쇠로 소문이 자자한 자였습니다. 소작료를 하루만 늦게 내도 가차 없이 멍석말이를 하고, 빚을 갚지 못하면 전답을 통째로 빼앗는 악랄한 위인이었지요. 달수는 잔칫집에 가고 싶지 않았으나, 혹여 장안의 부호들이 모이는 큰 자리라면 아비의 행방을 아는 자가 있을까 싶어 거문고를 메고 조 대감의 저택으로 향했습니다.
화려한 청사초롱이 밝혀진 대청마루에는 기름진 음식과 술이 넘쳐났습니다. 기름진 수염을 쓰다듬던 조 대감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거만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떠돌이 광대라 들었다. 내 귀를 울릴 만한 노래를 불러 보아라. 만약 내 심금을 울리지 못하면 당장 곤장을 쳐서 쫓아낼 터이다."
달수는 마당 한구석 멍석 위에 꿇어앉아 거문고 줄을 튕기며 아비를 찾던 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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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 울려 퍼진 놋쇠 방울 소리
"칠흑 같은 밤길이라도 / 아비의 발소리 들릴 듯한데 / 삼십 년 비바람에 뼈마디가 녹아내려도 / 자식은 아직도 길 위에 서 있네……."
달수의 쉰 목소리가 밤하늘을 찌르듯 올라가자, 흥청거리던 잔칫석이 찬물을 끼얹은 듯 괴괴해졌습니다. 술잔을 기울이던 조 대감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이내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버렸지요.
"그 노래를…… 네놈이 그 노래를 어디서 배웠느냐!"
조 대감이 벌떡 일어나며 찻잔을 마당으로 내던졌습니다. 쨍그랑하는 파편 소리와 함께 그가 소리쳤습니다.
"불길한 곡조로 내 잔칫집을 망치려 드는구나! 여봐라, 저놈을 묶어 뒤뜰 어두운 곳간에 처넣어라! 날이 밝는 대로 관아에 넘겨 볼기를 칠 것이다!"
장정들이 달려들어 달수를 결박했습니다. 달수는 영문도 모른 채 뭇매를 맞으며 헛간 옆 낡은 돌곳간으로 거칠게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피 묻은 대나무
쾅 닫힌 곳간 문밖으로 쇠사슬 잠그는 소리가 덜컹 울렸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달수는 피멍이 든 몸을 웅크렸지요. 그때였습니다. 곳간 구석 바닥 밑바닥에서 무언가 달그락거리는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거기…… 뉘시오?"
달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낮게 깔린 바람 소리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습니다. 달수는 기어가 바닥에 깔린 멍석을 걷어냈습니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바닥을 파서 만든 깊은 토굴이 있었고, 쇠사슬에 묶인 백발의 노인이 갇혀 있었습니다. 달수가 품속에 숨겨두었던 부싯돌을 쳐서 작은 불씨를 일으켜 세웠을 때, 노인의 얼굴이 희미하게 드러났습니다.
두 눈이 하얗게 먼 노인은 깡마른 손으로 바닥을 더듬거리며 달수가 떨어뜨린 소지품을 쥐었습니다. 그것은 달수의 아비가 남겨 주었던 구멍 일곱 개짜리 대나무 피리였습니다.
"이…… 이 피리는…… 내 아들 달수의 것이 아니냐?"
노인의 입에서 터져 나온 한마디에 달수의 심장이 멎을 듯 쿵쾅거렸습니다.
"아, 아버지? 정말 아버지십니까? 어찌 이곳에…… 어찌 이런 꼴로 계십니까!"
노인은 달수의 얼굴을 떨리는 손으로 더듬으며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조창학, 그놈이 바로 삼십 년 전 내 눈을 멀게 하고 나를 이곳에 가둔 원수다……!"
진실은 참혹했습니다. 본래 조창학은 서른 해 전 박 노인과 함께 금강산으로 약초를 캐러 다니던 동무였습니다. 산속 깊은 동굴에서 백 년 묵은 천삼(天蔘) 두 뿌리를 발견하자, 눈이 뒤집힌 조창학이 약초를 독차지하고자 박 노인의 두 눈을 독풀로 멀게 하고 절벽 아래로 밀어버렸던 것입니다.
박 노인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아들을 찾아가려 했으나, 부자가 되어 세력을 키운 조창학이 그를 기어이 찾아내 입을 막고자 이 깊은 지하 토굴에 삼십 년 동안 가두어 두고 죽지 못할 만큼의 찌꺼기 밥만 던져 주었던 것이지요. 피리 끝에 달린 놋쇠 방울은, 본디 박 노인이 아들에게 주기 위해 품에 지니고 있다가 도망칠 때 떨어뜨렸던 증표였습니다.
"그놈이 내 노래를 듣고…… 나를 알아본 것이었군요."
달수는 분노로 온몸을 떨었습니다. 마침 잔치가 끝나고 모두가 깊이 잠든 한밤중, 문밖에서 조창학이 식칼을 든 채 조용히 자물쇠를 따고 들어왔습니다. 비밀을 완전히 묻어버리기 위해 달수마저 해치우려던 참이었습니다.
"네놈이 살아서는 이 문을 나가지 못한다."
조창학이 번뜩이는 칼을 치켜들고 달려드는 순간, 달수는 품고 있던 묵직한 거문고를 휘둘러 그의 팔을 내리쳤습니다. 쨍그랑 칼이 떨어지고, 달수는 삼십 년간 품어온 통한의 힘으로 조창학을 덮쳐 제압한 뒤 그가 가져온 밧줄로 꽁꽁 묶어버렸습니다.
이튿날 아침, 달수는 피 묻은 피리와 쇠사슬에 묶여 있던 아비를 수레에 태우고, 결박한 조창학의 멱살을 잡은 채 고을 관아로 당당히 걸어 들어갔습니다. 삼십 년간 갇혀 지낸 노인의 증언과 조창학의 곳간 바닥에서 나온 흉기들 앞에 사또는 엄벌을 내렸지요. 조창학의 전 재산은 몰수되어 빈민들에게 나누어졌고, 조창학은 변방의 외딴섬으로 평생 귀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달수는 마침내 되찾은 눈먼 아비를 지게에 업고 고향 문경새재를 향해 길을 나섰습니다. 아비의 여윈 손에는 삼십 년 만에 되찾은 피리가 쥐어져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놋쇠 방울이 맑은 소리를 내며 부자의 앞길을 환하게 울려 주었더랍니다.
맺으며
삼십 년을 떠돈 효심의 노랫소리가 마침내 어둠 속에 갇힌 혈육을 찾아내고 오랜 죄악을 밝혀냈으니, 하늘의 그물은 성겨 보여도 결코 악을 놓치지 않는 법입니다. 여러분도 우연히 들은 노랫가락이나 작은 물건 하나에 얽힌 기이한 인연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한밤중 외딴 주막을 찾은 소금 장수가 가마솥 밑바닥에서 발견한 여인의 붉은 댕기.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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