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15 13

강계 관아의 차가운 옥을 녹인 늙은 시객의 시조 한 수와 비밀 장부

▶ 영상으로 먼저 만나 보세요칼바람이 살을 에는 북방 강계 땅의 겨울밤, 관아의 작은 별당에는 살얼음 같은 침묵이 흐르고 있었더랍니다. 숯불 화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이는 백발이 성성한 유배객과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을 한 관기였지요.얼어붙은 북녘 땅의 은밀한 밀명선조 임금 시절,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평안도 강계 땅으로 쫓겨온 송강 정철은 그저 낡은 붓과 술병에 기대어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시와 풍류로 천하를 울렸던 대문장이었으나, 거친 북변의 삭풍 앞에서는 그저 초라한 늙은이에 불과했지요.그런 그가 머무는 처소에 어느 날 밤, 관아에서 가장 빼어나다는 기생 진옥이 홀로 찾아왔습니다. 옥처럼 맑고 차가운 자태를 지닌 진옥은 술잔을 채우면서도 단 한 번 미소를 짓지 않았지요. 진옥이 ..

인물야담 14:06:43

대감마님의 담을 넘은 밤도둑이 포도청 군관의 멱살을 잡은 까닭

▶ 영상으로 먼저 만나 보세요선조 임금 시절, 한양 남산 밑 백사(白沙) 이항복 대감의 사랑채 지붕 위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살금살금 기어들었더랍니다.스산한 초겨울 바람이 문풍지를 흔들던 야심한 밤, 창호지 문틈으로 칼날 같은 비수가 쑥 들어와 문고리를 비틀어 열었지요.서까래 밑에 숨어든 칼잡이방 안에는 기름등잔 하나가 가물거리고 있었고, 백사 대감은 벼루에 먹을 갈며 책장을 넘기던 중이었습니다. 문이 스르륵 열리자 복면을 쓴 건장한 사내가 방 안으로 불쑥 뛰어들었지요. 번쩍이는 칼날이 백사의 목덜미 턱밑까지 바짝 다가섰습니다."소리치면 목숨은 없다. 집안의 패물과 은자(銀子)를 몽땅 내놓아라!"그 도둑의 이름은 최달식이라 하였는데, 본래 관군의 힘센 마부였으나 억울하게 쫓겨나 어두운 뒷골목을 떠돌며 칼..

인물야담 13:57:32

궁궐 지붕을 뚫은 붉은 지네의 꿈으로 역적의 은밀한 독살을 막아낸 야경꾼

▶ 영상으로 먼저 만나 보세요사방이 꽉 막힌 구중궁궐 한가운데서 용상이 피를 토하고 무너지는데, 어찌 네놈 같은 일개 야경꾼이 그 흉조를 미리 보았단 말이냐!"의금부 앞뜰 차디찬 박석 위에 붉은 피가 흥건하게 튀었더랍니다. 쇠사슬에 꽁꽁 묶여 엎드린 사내의 등짝 위로 매서운 형장이 사정없이 내리꽂히고 있었지요.어둠을 깨우는 순라꾼의 기이한 잠꼬대때는 조선 인조 임금 시절, 한양 도성의 밤은 그 어느 때보다 음산하고 뒤숭숭했더랍니다. 도성의 야간 통행을 감시하고 순찰을 도는 경수소의 말단 야경꾼 배칠복은 본래 천성이 우직하고 잠귀가 밝은 사내였지요. 칠복의 소원은 그저 늙은 홀어머니에게 흰쌀밥 한 번 배불리 대접하고 무탈하게 늙어가는 것뿐이었답니다.그런 칠복이 어느 날 밤, 야경을 서다 깜빡 든 선잠 속에..

기담·괴담 13:46:24

달밤 폐가에 숨어든 가난한 선비와 은비녀를 품은 천년 묵은 여우의 최후

▶ 영상으로 먼저 만나 보세요달빛조차 푸르스름하게 얼어붙은 야심한 밤이었습니다. 인적 끊긴 산골짝 한구석, 잡초가 무성한 폐가 안으로 피비린내 섞인 찬 바람이 훅 끼쳐 들었지요.흙먼지가 자욱한 마루에 주저앉아 헐떡이던 젊은 선비는 마당 한가운데에 서서히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고 그만 숨을 턱 멈추고 말았더랍니다.추풍령 고갯길의 비바람때는 조선 인조 임금 시절, 충청도 영동 땅 추풍령 자락이었지요.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던 남양 홍씨 집안의 몰락한 유생 홍도령, 홍기석은 성품이 곧고 우직하여 남의 것을 탐할 줄 모르는 선비였습니다. 허나 손에 쥔 노자라고는 엽전 닷 냥과 어머니가 장가가거든 며느리에게 건네라며 쥐여 준 낡은 '벽조목(벼락 맞은 대추나무) 은비녀' 하나뿐이었지요.날이 저물자 별안간 하늘이 ..

기담·괴담 13:34:42

서대문 밖 빗속에서 곡하던 처녀 귀신과 비단 장수가 품고 달아난 붉은 주머니

▶ 영상으로 먼저 만나 보세요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대비 사이로 묘한 곡소리가 도성 서쪽을 흔들었더랍니다. 눅눅한 흙먼지가 피비린내와 뒤섞여 올라오던 영조 28년 유월의 그믐밤, 굳게 닫힌 돈의문 밖 돌담 아래에는 젖은 소복을 입은 여인의 그림자가 어김없이 어른거렸지요.그 길목을 지나는 길손마다 헛것을 보았다며 사지가 뒤틀려 쓰러지기 일쑤였는데, 귀신을 마주한 자들의 입에선 한결같이 "붉은 댕기를 쥔 손이 목을 조른다"는 비명만 터져 나왔습니다.서대문 밖 주막의 수상한 손님들한양포도청의 참모포교 배도현은 무뚝뚝하지만 억울한 사정을 보면 제 밥상도 엎고 나서는 대쪽 같은 성품이었지요.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도성 백성들이 억울한 누명 없이 다리 뻗고 자는 평온한 세상뿐이었습니다. 빗줄기가 처마를 뚫을 ..

기담·괴담 13:23:16

호랑이 덫에 제 발로 걸려든 나그네가 하룻밤 새 목숨을 건진 곡절

▶ 영상으로 먼저 만나 보세요달그락, 덜컥!"시퍼런 쇠날이 맞부딪치며 뼈를 으스러뜨리는 소리가 칠흑 같은 어둠을 찢어발겼습니다. 비명이 터져 나올 법도 하건만, 깊은 산중에 갇힌 사내는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삼켰더랍니다.사내의 다리를 억센 이빨처럼 물고 늘어진 것은 짐승의 뼈마디도 단숨에 끊어낸다는 맹호박(猛虎縛), 즉 쇠로 만든 대형 호랑이 덫이었습니다.눈먼 길 위의 몰락 양반때는 숙종 대, 강원도 삼척 땅의 깊고 험한 쉰움산 자락이었습니다. 덫에 걸려 피를 흘리는 사내는 한양에 살던 몰락 양반 한진우였지요.본래 심성이 우직하고 남을 속일 줄 모르는 진우는 노모의 약값을 구하려 삼척의 먼 친척에게 돈을 빌리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해가 서산 너머로 뚝 떨어지고 진눈깨비까지 흩날리자, 그만 호랑이가..

조선야담 13:13:48

재상 집 쌀 삼백 석을 훔친 자가 포도청 뜰에서 호통을 친 까닭

▶ 영상으로 먼저 만나 보세요어둠이 짙게 깔린 한양 북촌, 높다란 솟을대문 안쪽에서 별안간 묵직한 자물쇠 부서지는 소리가 났더랍니다. "도둑이야! 곳간 문이 열렸다!" 야경꾼의 다급한 꽹과리 소리가 고요한 밤공기를 찢어발겼지만, 이미 커다란 그림자 여럿이 쌀가마니를 짊어지고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지요.그 밤, 조정의 실세라 불리던 좌의정 윤창호의 사가에서 무려 삼백 석이나 되는 쌀과 은화 천 냥이 털렸습니다. 기이하게도 털린 곳간 벽에는 붉은 먹으로 큼지막한 참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그림이 버젓이 남겨져 있었지요.어둠 속을 나는 참새이 신출귀몰한 도둑의 우두머리는 저잣거리에서 '참새'라 불리는 사내, 배동출이었습니다. 동출은 본래 함경도 변방의 군관 출신이었으나, 부패한 상관의 모함으로 쫓겨난 뒤 도탄에 ..

조선야담 13:03:53

낡은 짚신을 신은 선비와 과거 시험장에 나타난 푸른 도포의 원혼

▶ 영상으로 먼저 만나 보세요어스름한 새벽안개가 한양 성균관 마당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더랍니다. 춘당대 과거 시험장 한구석, 백 촉의 촛불이 일제히 일렁이더니 삭풍도 없는 허공에서 서늘한 입김이 훅 하고 피어올랐지요. 시제(試題)가 적힌 현판 아래 웅크린 선비들 틈으로, 발이 땅에 닿지 않은 푸른 도포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스며들었습니다.곰팡내 나는 봇짐과 썩은 짚신선조 임금 시절, 경상도 안동 산골짝에는 이름 석 자조차 가난에 찌든 조영석이라는 가난한 선비가 살았더랍니다. 홀어머니가 베를 짜서 겨우 마련해 준 노잣돈을 품에 쥐고 한양까지 걸어오느라 영석의 짚신은 밑창이 다 닳아 피고름이 엉겨 붙어 있었지요. 글재주는 비단결처럼 빼어났으나, 주머니엔 마른 좁쌀 반 됫박뿐인 처량한 몰골이었습니다."과거장..

기담·괴담 12:50:46

엄동설한 얼어붙은 강바닥에서 붉은 비늘 잉어가 솟구친 까닭

▶ 영상으로 먼저 만나 보세요동짓달 칼바람이 살갗을 베어내던 깊은 밤, 꽁꽁 얼어붙은 남한강 한가운데에 한 젊은이가 엎드려 울부짖고 있었더랍니다.도끼로 내리쳐도 하얀 흠집만 날 뿐 깨지지 않는 두꺼운 얼음판 위로, 소년의 피 묻은 손가락이 붉은 자국을 길게 남기고 있었지요.기운 가문의 외아들과 병든 어머니숙종 임금 시절, 충청도 충주목 달천 강가에는 박진우라는 가난한 서생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더랍니다.진우는 성품이 유순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동네에서도 칭찬이 자자했으나, 가세가 몹시 기울어 끼니조차 잇기 어려웠지요.그의 어머니는 해를 넘기기 힘들 만큼 모진 온역을 앓아 자리에 누웠는데, 숨이 턱에 닿아 가냘프게 읊조렸습니다."진우야… 내 목구멍으로 넘어갈 것은 오직 싱싱한 잉어 탕 한 그릇뿐이구나. 하..

감동·효도 12:41:19

눈먼 시어머니의 눈물겨운 탕약과 밤마다 험한 고개를 넘던 며느리의 은비녀

▶ 영상으로 먼저 만나 보세요달빛도 숨어버린 그믐밤, 강원도 삼척 고을의 험준한 산수재 너머로 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이 그림자처럼 스러져 가고 있었더랍니다. 가파른 바윗길을 맨발에 짚신 한 짝으로 버티며 피를 흘리면서도, 여인의 품에는 작고 낡은 사기호롱 하나가 소중하게 안겨 있었지요.마을 사람들은 밤마다 산수를 넘는 이 여인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습니다. 삼 년 전 남편을 잃고 눈까지 멀어버린 시어머니를 모시는 청상과부 은실이었는데, 밤마다 넋이 나간 듯 산을 오르내리니 여우에 홀렸다는 흉흉한 소문마저 돌았더랍니다.피 묻은 버선발과 밤안개때는 조선 숙종 임금 시절, 첩첩산중 삼척도호부 묵호포 인근의 산골 마을이었습니다. 은실은 가난한 화전민의 딸로 태어나 천성이 온유하고 효심이 깊었으나, 혼인한 지 반년..

감동·효도 12:2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