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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조차 푸르스름하게 얼어붙은 야심한 밤이었습니다. 인적 끊긴 산골짝 한구석, 잡초가 무성한 폐가 안으로 피비린내 섞인 찬 바람이 훅 끼쳐 들었지요.
흙먼지가 자욱한 마루에 주저앉아 헐떡이던 젊은 선비는 마당 한가운데에 서서히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고 그만 숨을 턱 멈추고 말았더랍니다.
추풍령 고갯길의 비바람
때는 조선 인조 임금 시절, 충청도 영동 땅 추풍령 자락이었지요.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던 남양 홍씨 집안의 몰락한 유생 홍도령, 홍기석은 성품이 곧고 우직하여 남의 것을 탐할 줄 모르는 선비였습니다. 허나 손에 쥔 노자라고는 엽전 닷 냥과 어머니가 장가가거든 며느리에게 건네라며 쥐여 준 낡은 '벽조목(벼락 맞은 대추나무) 은비녀' 하나뿐이었지요.
날이 저물자 별안간 하늘이 시커멓게 뒤집히더니 억수 같은 장대비가 쏟아졌습니다. 길을 잃고 산을 헤매던 기석의 눈에 다 쓰러져 가는 기와집 한 채가 들어왔더랍니다.
"이런 첩첩산중에 웬 폐가란 말인가. 허나 비를 피할 곳이 여기뿐이니 하룻밤만 신세를 져야겠구나."
기석이 삐걱거리는 문을 밀고 들어가 젖은 도포를 짜내고 있을 때였습니다. 밖에서 스산한 바람과 함께 사각거리는 비단옷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지요.
어둠 속에서 나타난 묘령의 여인
"아니, 이 밤중에 뉘시오?"
기석이 흠칫 놀라 소리치자, 방 문간에 기대선 여인이 살포시 고개를 들었더랍니다. 하얀 모시적삼 너머로 눈부시게 흰 살결과 붉은 입술을 드러낸 여인은, 숨이 멎을 만큼 빼어난 미색을 지니고 있었지요. 여인의 젖은 눈망울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 애처로움이 가득했습니다.
"선비님, 놀라지 마셔요. 저는 아랫마을 김 진사 댁 막내딸 옥선이라 하옵니다. 계모의 모함을 견디지 못해 야반도주하다 그만 길을 잃었지요."
여인은 가녀린 손으로 옷소매를 적시며 기석의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기석은 헛기침을 하며 뒤로 물러섰지요.
"남녀가 유별하거늘, 어찌 처자가 외간 남자와 한방에 들려 하시오. 비가 그칠 때까지 저는 봉당에 머물 테니, 낭자는 안방으로 드시오."
"선비님도 참 야속하셔라. 이 깊은 산골에서 얼어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찌 저를 밀어내기만 하십니까? 이 잔을 받으시고 몸이라도 녹이셔요."
옥선은 품에서 옥병과 술잔을 꺼내어 향긋한 국화주를 따랐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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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향기와 드러난 그림자
달콤한 술향기가 코끝을 찔렀으나, 이상하게도 그 냄새 밑바닥에서 누린 비린내가 희미하게 풍겼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지요. 번개가 번쩍하며 방 안을 비출 때, 여인의 그림자가 벽에 길게 드리워졌는데 사람의 머리가 아니라 뾰족한 주둥이를 가진 짐승의 형상이었습니다.
옥선이라는 처자의 정체는 바로 추풍령 골짜기에서 삼백 년을 묵은 늙은 암여우 '호랑'이었더랍니다. 놈은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의 간을 백 개 파먹어 완전한 인간이 되려는 끔찍한 탐욕을 품고 있었지요. 이미 아흔아홉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이제 마지막 한 놈만 채우면 온전한 사람이 되는 참이었습니다.
"선비님, 소첩의 간곡한 청을 거절치 마셔요. 오늘 밤 저와 백년가약을 맺어 주신다면,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드리겠습니다."
여인은 눈웃음을 치며 기석의 옷깃을 잡아당겼습니다. 붉은 입술이 기석의 목덜미로 다가왔고, 그녀의 손톱 끝이 서서히 날카로운 갈고리처럼 굳어지기 시작했지요.
"낭자, 내 몸에 손을 대지 마시오. 나는 선비로서 아직 사당에 고하지도 않은 여인을 취할 수 없소!"
기석이 단호하게 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은비녀의 번뜩이는 진실
"호호호, 고지식한 샌님 같으니라고. 곱게 간을 내놓으면 편히 보내주려 했거늘!"
여인의 입에서 굵직하고 쉰내 나는 노파의 음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고운 옥선의 얼굴가죽이 좌르륵 벗겨지더니, 누런 털이 숭숭 난 여우의 주둥이와 시뻘건 눈동자가 드러났지요.
"내 마지막 백 번째 제물이 되어 다오!"
늙은 여우가 날카로운 발톱을 치켜들고 기석의 가슴팍을 향해 덮쳐들었습니다. 기석은 기겁하며 품속에 손을 넣었지요. 칼 한 자루 없던 그가 쥐어 잡은 것은 어머니가 건네주었던 벼락 맞은 대추나무, 벽조목으로 만든 은비녀였습니다.
"어머니, 소자를 굽어살피소서!"
기석이 눈을 질끈 감고 비녀를 허공에 마구 휘둘렀더랍니다. 그 찰나, 비녀 끝의 벽조목에서 푸른빛의 뇌전이 찌르르하고 튀더니 여우의 어깨를 깊숙이 찔렀지요. 본디 벼락 맞은 나무는 하늘의 양기가 서려 있어 백 가지 음기를 누르는 법이었습니다.
"꺄아악! 이, 이놈이 어찌 천둥의 기운을 품은 쇠붙이를…!"
괴성을 지른 여우는 피를 뿜으며 뒤로 나동그라졌습니다. 기석은 틈을 놓치지 않고 비녀를 단단히 쥐고는 괴물의 목덜미를 내리눌렀지요.
"네 요망한 것이 수많은 선량한 선비들을 홀려 해쳤구나! 하늘이 그물은 성겨도 죄지은 자는 결코 놓치지 않는다 하였다!"
기석이 정기를 모아 비녀를 여우의 미간 정중앙에 내리꽂았습니다. 늙은 여우는 마른 볏짚 타는 소리를 내며 온몸에서 시커먼 연기를 뿜어냈고, 이내 살점이 녹아내려 한 줌의 누런 털과 뼈마디로 변해 바스러졌더랍니다.
맺으며
동이 터 오자 흉흉했던 폐가는 거짓말처럼 아침 햇살에 씻겨 내려갔고, 기석은 여우의 유골 곁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봇짐과 엽전을 수습하여 인근 절에 시주하고 그들의 넋을 위로해 주었지요. 이후 기석은 무사히 한양에 당도하여 과거에 당당히 급제하였으며, 그 벽조목 은비녀는 훗날 정경부인이 된 지혜로운 아내의 머리에 아름답게 꽂혔더랍니다.
혹여 여러분도 비 내리는 깊은 밤, 호젓한 길목에서 너무나 아름답게 웃으며 술잔을 권하는 여인을 만나신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깊은 밤, 혼수를 훔치려던 도적이 규수의 방 장롱 속에서 마주한 끔찍한 비밀.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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