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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 험준한 산마루에는 까마귀조차 날기를 꺼린다는 깊은 골짜기가 하나 있었더랍니다. 칡넝쿨이 귀신 머리채처럼 얽힌 그 골짜기 어귀에는 오래전 버려져 흉흉한 소문만 돌던 기와폐가가 한 채 서 있었지요.
날이 저물고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면, 폐가 쪽에서 딱, 딱 하는 맑고도 서늘한 돌 부딪치는 소리가 골짜기를 타고 울려 퍼졌습니다. 그 소리를 따라간 사냥꾼들이 혼비백산하여 돌아와서는, 소복을 입은 여인이 촛불 하나 켜 두고 허공을 마주 보며 바둑을 두고 있더라고 입을 모았지요.
비바람 속의 길 잃은 나그네

때는 숙종 대의 일이었더랍니다. 한양에서 과거를 치르고 낙방하여 경상도 상주 본가로 터덜터덜 내려가던 젊은 선비 윤도진은 문경새재 조령관을 넘다 거센 소나기를 만났지요.
도포 자락이 물에 젖은 솜이불처럼 무거워지고 발걸음조차 떼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빗소리를 뚫고 어디선가 맑은 파열음이 들려왔지요.
"딱, 딱……."
주위를 둘러보니 어둠 속에서 희미한 등불 빛이 새어 나오는 낡은 고택이 보였습니다. 도진은 얼어붙은 손을 비비며 문살이 뜯겨 나간 문을 두드렸지요.
"지나가는 길손입니다. 비를 피할 처마라도 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기척이 없어 조심스레 문을 밀고 방 안을 들여다본 도진은 그만 숨을 들이켜고 말았답니다.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칠흑 같은 오동나무 바둑판, 그리고 그 앞에 소복을 입은 창백한 여인이 홀로 앉아 있었지요. 여인의 턱짓을 본 도진은 홀린 듯 방으로 들어섰습니다.
허공을 향해 놓인 흑백의 돌

여인은 도진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고, 그저 옥 같은 손으로 백돌을 집어 판 위에 내려놓을 뿐이었지요. 이상하게도 여인은 흑돌과 백돌을 번갈아 쥐며 혼자 두고 있었습니다.
"험한 날에 어찌 이런 흉가에서 홀로 수담을 나누고 계십니까?"
도진의 물음에 여인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더랍니다. 입술에 핏기가 하나도 없는 여인은 맑으면서도 깊은 한이 서린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지요.
"마주 앉을 벗이 없어, 세상을 떠난 이와 못다 둔 판을 이어가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소생이 미천한 실력이나마 한 수 상대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여인은 말없이 백돌 통을 도진 쪽으로 밀어 주었지요. 도진은 바둑판을 내려다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흑돌이 만들어 둔 형세가 기이하게도 누군가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자 '원(冤)' 자 모양을 이루어 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게다가 여인의 오른손 엄지 아래에는 붉고 둥근 사마귀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습니다.
새재 주막의 탐관오리와 사라진 부호

바둑이 중반에 이를 무렵, 여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더랍니다.
"선비님, 문경 관아의 이방 배칠성을 아시옵니까?"
"배칠성이라…… 새재 아래 주막거리에서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기로 악명 높은 자라 들었습니다."
"그자는 본래 삼 년 전 이 골짜기에서 부유하게 살던 약재상 한진사 댁의 집사였지요. 주인을 독살하고 전 재산을 빼앗은 뒤 관아의 벼슬을 샀습니다."
도진이 의아해하며 물었더랍니다.
"그 억울한 사정을 관아에 고변하지 못했습니까?"
"한진사에게는 명민하여 바둑을 귀신같이 두던 딸이 하나 있었지요. 그녀는 아비의 억울함을 밝히고자 상소문을 품고 한양으로 떠나려 했습니다. 허나 배칠성이 보낸 자객들의 칼에 맞아 이 방에서 비명횡사하고 말았지요."
여인이 흑돌을 내려놓으며 손가락으로 바둑판의 한구석을 가리켰습니다. 바둑판 귀퉁이 나무 결 안쪽에 피로 쓰여 말라붙은 글씨, '칠성살부(七星殺父)' 네 글자가 도진의 눈에 박혔더랍니다. 배칠성이 아비를 죽였다는 명백한 다잉 메시지였지요.
폭풍우를 뚫고 들이닥친 칼날
바로 그때, 폐가의 썩은 사립문이 거칠게 부서지며 횃불을 든 무리가 들이닥쳤더랍니다.
"이 야심한 밤에 폐가에서 귀신놀음을 하는 놈들이 누구냐!"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는 기름진 얼굴에 흉포한 눈을 번뜩이는 자였으니, 바로 문경 관아의 배칠성이었지요. 그는 인근 주막에 머물다 폐가에서 불빛이 보인다는 부하의 밀고를 듣고 칼을 차고 달려온 참이었습니다.
"네놈은 웬 떠돌이 선비 녀석이냐? 그리고 저 계집은……!"
배칠성은 바둑판 앞에 앉은 소복 입은 여인을 보더니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한…… 한소운? 네년이 어찌 살아 있단 말이냐! 내 손으로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이 마루 밑에 묻었거늘!"
도진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지요.
"네 이놈 배칠성! 네 죄를 스스로 실토하는구나! 이 바둑판에 새겨진 피 묻은 고변과 네 놈의 자백이 여기 있거늘, 하늘이 두렵지 않으냐!"
배칠성은 이내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환도를 뽑아 들었더랍니다.
"크큭, 죽은 년이 귀신이 되어 돌아왔든, 눈먼 선비 놈이 참견을 하든 상관없다. 둘 다 베어 골짜기에 던져 버리면 그뿐이다!"
오동나무 바둑판에 새겨진 진실
배칠성이 서슬 퍼런 칼을 휘두르며 도진의 목을 향해 쇄도하던 찰나였습니다. 얌전하게 앉아 있던 여인이 소매 속에서 흑돌 한 웅큼을 쥐어 배칠성의 눈가를 향해 벼락같이 뿌렸지요.
"큭! 내 눈!"
배칠성이 눈을 감싸 쥐고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리자, 여인은 단도를 꺼내 그의 어깨를 깊숙이 찔러 바닥에 메쳤습니다. 여인의 몸놀림은 귀신이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무인의 그것이었지요. 횃불이 방 안을 비추자, 도진은 여인의 뺨에 맺힌 차가운 땀방울과 거친 숨소리를 똑똑히 보았더랍니다.
"그대는…… 망령이 아니었소?"
여인이 서늘한 목소리로 답했습니다.
"망령이 아닙니다. 저는 죽창에 찔렸으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한소운 본인입니다. 지난 삼 년간 무예를 닦으며, 배칠성 저놈이 제 발로 이곳을 찾아오도록 밤마다 흉가 소문을 내며 때를 기다려 왔습니다."
소운은 배칠성을 밧줄로 꽁꽁 묶은 뒤, 오동나무 바둑판을 번쩍 들어 바닥에 내리쳤지요. 판이 쪼개지자 그 안에 숨겨져 있던 한진사의 친필 유서와 배칠성이 독약을 사들인 약방 장부 사본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더랍니다.
"이것이 배칠성 저자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아버님께서 숨겨 두신 원본 증좌입니다. 선비님, 저를 도와 문경현감에게 저놈을 압송해 주시겠습니까?"
맺으며
배칠성의 만행과 증좌는 다음 날 아침 관아에 낱낱이 밝혀졌고, 문경현감은 배칠성을 하옥한 뒤 능지처참의 형을 내렸더랍니다. 억울한 누명을 벗고 가문의 신원을 회복한 소운은 되찾은 가산을 가난한 화전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준 뒤, 홀연히 새재 너머 어디론가 길을 떠났지요.
바람 부는 깊은 밤, 억울한 넋을 달래려던 바둑돌 소리는 이제 새재 골짜기에서 영영 사라졌다고 전해집니다. 혹 여러분도 인적 드문 산길 폐가에서 홀로 수담을 나누며 정의를 기다리는 이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한밤중 도살장 뒷마당에서 가마솥을 핥던 꼬리 아홉 달린 백정의 정체는?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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