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담·괴담

툇마루 밑에서 흘러나온 피 묻은 짚인형과 사라진 현감의 숨겨진 비녀

지은미소 2026. 10. 18.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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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칠흑 같은 밤이었습니다. 깊은 산골짝 외딴 암자의 툇마루 밑에서 난데없는 여인의 서글픈 곡소리가 새어 나왔지요. "아이고, 아이고… 내 목을 돌려다오…" 소름 끼치는 울음에 풍경마저 파르르 떨리던 괴이한 밤이었습니다.

외딴 암자의 밤손님

숙종 임금 시절, 강원도 영월 땅 험준한 산자락에 무량암이라는 작고 낡은 암자가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누이의 넋을 기리며 홀로 불공을 드리던 낙향 선비 배진우가 머물고 있었지요. 진우는 본래 바르고 강직한 성품이었으나, 삼 년 전 홀연히 사라진 누이 배씨의 행방을 찾지 못해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런 암자에 비바람을 뚫고 웬 손님이 들이닥쳤습니다. 바로 이웃 고을의 부유한 토호이자 새로 현감 자리를 꿰찬 마도현이었습니다. 기름진 얼굴에 거만한 눈빛을 한 마도현은 비에 젖은 도포를 털며 다짜고짜 소리를 쳤지요.

"이보게, 방을 내오너라! 비가 그칠 때까지 쉬어 갈 터이니 밥상도 정갈하게 차려 오렷다."

진우는 달갑지 않았으나 길 잃은 과객을 내칠 수 없어 건넌방을 내주었습니다.

툇마루 아래서 새어 나온 곡성

야심한 자정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빗소리 사이로 낮게 깔리는 괴이한 울음소리가 암자 안을 뒤흔들었지요.

"아이고, 억울해라… 내 목을 조른 놈이 눈앞에 있구나…"

섬뜩한 여인의 목소리에 진우는 등잔불을 들고 마당으로 뛰어나왔습니다. 마도현 역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지요.

"이, 이 무슨 해괴한 소리냐! 이 절간에 귀신이라도 산단 말이냐?"

마도현의 목소리는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습니다.

진우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을 더듬어 마도현이 서 있는 툇마루 아래를 비추었습니다. 축축한 흙바닥 틈새에서 붉은 물이 뚝뚝 배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흙을 헤쳐 내자, 썩어가는 가마니 속에서 누런 짚인형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지요. 인형의 목에는 굵은 노끈이 감겨 있었고, 가슴팍에는 시뻘건 글씨로 누군가의 생년월일이 적혀 있었습니다.

짚인형 품에서 떨어진 증좌

"이건… 흉측한 저주 인형이 아니오!"

마도현은 기겁하며 뒤로 나자빠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도현의 눈동자는 단순히 귀신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을 본 사람처럼 흔들리고 있었지요.

"당장 저 불길한 것을 불태워 버려라! 썩 태우지 못할까!"

마도현이 비명을 지르며 짚인형을 발로 걷어차려던 찰나였습니다.

풀어진 짚 단 사이에서 찰랑 하는 맑은 쇳소리와 함께 은비녀 하나가 툭 떨어졌습니다. 그 비녀 끝에는 영롱한 옥비둘기가 조각되어 있었지요. 비녀를 본 진우의 눈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커졌습니다. 그것은 삼 년 전 혼인을 앞두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친누이, 배씨가 어머니에게 물려받았던 유일한 가보였습니다.

진우는 떨리는 손으로 비녀를 집어 들며 마도현을 쏘아보았습니다.

"나리, 어찌하여 제 누이의 비녀가 저 흉측한 짚인형의 심장에 박혀 있었던 것입니까?"

드러난 핏빛 진실

마도현은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내, 내가 어찌 알겠느냐! 그깟 비녀가 왜 거기 있는지 내가 알 바 아니다!"

하지만 마도현의 오른손 손등에는 삼 년이 지난 지금도 지워지지 않은 깊은 이빨 자국 흉터가 남아 있었습니다. 생전 누이가 납치범에게 완강히 저항하다 남겼다던 바로 그 상흔이었지요. 진우가 서늘한 목소리로 다그쳤습니다.

"누이가 사라지던 날 밤,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이 바로 나리의 저택 앞이었습니다. 권세를 이용해 관아의 입을 막고는, 몹쓸 짓을 저지른 뒤 누이를 이 외딴 암자 밑에 암매장하고 넋이 구천을 떠돌며 복수하지 못하도록 저주 인형을 박아 둔 것이 아닙니까!"

진우의 서릿발 같은 추궁에 마도현은 제 발이 저려 품에서 비수를 꺼내 들었습니다.

"알았으면 너도 죽어야겠다! 가난뱅이 선비 놈 주제에 감히 뉘 앞이라고 입을 놀려!"

마도현이 진우의 목을 찌르려 달려들던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툇마루 밑에서 시퍼런 도깨비불 같은 연기가 치솟더니, 마도현의 발목을 억센 짚풀 넝쿨이 옭아맸습니다.

"으악! 놔라, 이거 놓지 못해!"

마도현은 허공에 허우적대다 툇마루 모서리에 머리를 세게 찧고 그대로 고꾸라졌습니다.

원한을 풀고 넋을 달래다

날이 밝자마자 진우는 포도청에 고변하였고, 포졸들이 암자 툇마루 밑을 깊이 파내자 비녀의 주인인 누이의 유골이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짚인형의 가슴에 적힌 붉은 글씨는 다름 아닌 마도현 자신의 사주단자였으니, 누이가 숨을 거두기 직전 제 손으로 마도현의 품에서 뺏어 삼켰던 종이를 가마니에 함께 묻어 둔 것이었지요. 현감 마도현은 천인공노할 살인과 주술 매장 죄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참형에 처해졌습니다.

진우는 양지바른 언덕에 누이의 유골을 곱게 묻어 주고 짚인형을 깨끗이 태워 하늘로 날려 보냈습니다. 인형이 재가 되어 날아가던 날, 진우의 귓가에는 누이의 맑은 웃음소리가 바람결에 스쳐 지나갔더랍니다.

맺으며

억울한 넋은 천 리 길 흙 속에 묻혀도 기필코 제 목소리를 내어 진실을 밝히는 법이지요. 아무리 짙은 어둠이라도 죄악의 그림자까지 감추지는 못하는 법입니다. 여러분도 깊은 밤 문득 들려오는 바람 소리 속에서 억울한 사연을 품은 목소리를 느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한양 피맛골 주막의 솥뚜껑 아래서 하룻밤 사이에 금괴로 변해 버린 썩은 동아줄의 내력.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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