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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한 새벽안개가 한양 성균관 마당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더랍니다. 춘당대 과거 시험장 한구석, 백 촉의 촛불이 일제히 일렁이더니 삭풍도 없는 허공에서 서늘한 입김이 훅 하고 피어올랐지요. 시제(試題)가 적힌 현판 아래 웅크린 선비들 틈으로, 발이 땅에 닿지 않은 푸른 도포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스며들었습니다.
곰팡내 나는 봇짐과 썩은 짚신

선조 임금 시절, 경상도 안동 산골짝에는 이름 석 자조차 가난에 찌든 조영석이라는 가난한 선비가 살았더랍니다. 홀어머니가 베를 짜서 겨우 마련해 준 노잣돈을 품에 쥐고 한양까지 걸어오느라 영석의 짚신은 밑창이 다 닳아 피고름이 엉겨 붙어 있었지요. 글재주는 비단결처럼 빼어났으나, 주머니엔 마른 좁쌀 반 됫박뿐인 처량한 몰골이었습니다.
"과거장에 들어서기나 할 수 있을런지…."
영석은 주막 문턱도 넘지 못하고 처마 밑에서 찬바람을 피하며 붓을 쥐어 보았습니다. 손가락이 곱아 굳어가던 그때, 화려한 비단 두루마기를 걸치고 가마에서 내리는 한 사내가 눈에 들어왔지요. 좌의정 대감의 조카이자 한양 바닥에서 세도가로 소문난 배수겸이었습니다.
배수겸은 흙먼지투성이인 영석을 턱 끝으로 가리키며 코를 틀어막았습니다.
"어디서 거지 발싸개 같은 산골 놈이 양반 흉내를 내며 알짱거리느냐? 네놈이 벼슬길에 오른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배수겸의 곁에 선 하인들이 낄낄거리며 영석의 봇짐을 발로 걷어찼고, 낡은 책장들이 진흙탕에 나뒹굴었더랍니다.
어두운 시험장에 나타난 손님

이튿날 날이 밝자 과거 시험장인 성균관 뜰에 삼천 명의 유생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영석은 마당 맨구석, 빗물이 고인 진흙 바닥에 멍석 한 장을 깔고 겨우 자리를 잡았지요.
드디어 시제가 내걸렸습니다. '달빛 아래 억울한 넋을 위로하는 글을 짓되, 나라의 바른 법도를 논하라.'
붓을 들고 먹을 갈던 영석의 귓가에 별안간 얼음장처럼 차가운 음성이 스쳤습니다.
"그 붓을 나에게 빌려다오."
깜짝 놀라 고개를 든 영석의 눈앞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더랍니다. 시퍼런 얼굴에 핏자국이 선연한 푸른 도포 차림의 청년이 영석의 옆에 서 있었지요. 청년의 발치에는 피 묻은 비단 신 한 짝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다른 선비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 글을 짓기에만 바빴습니다.
"귀… 귀신이시오?"
영석이 사시나무 떨듯 떨며 묻자, 원혼은 슬픈 눈으로 피 묻은 비단 신을 가리켰습니다.
"나는 작년 식년시에 급제할 뻔했던 충청도 선비 이진우요. 내 목숨을 앗아간 자가 저기 버젓이 앉아 있소. 공이 내 억울함을 먹물로 풀어준다면, 과거 급제의 영광을 돌려드리리다."
핏빛 붓끝과 숨겨진 비밀
원혼의 원통한 사연은 이러했더랍니다. 작년 시험 전날 밤, 배수겸은 글재주가 뛰어난 이진우를 주막으로 유인하여 술에 독을 탔지요. 진우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자, 배수겸은 그가 지어둔 비단 보자기에 싸인 초고를 훔치고 시신을 우물에 던져버렸던 것입니다.
"내 발에서 벗겨진 비단 신 한 짝을 배수겸이 부적 삼아 품고 다니오. 자기가 죽인 자의 혼이 붙지 못하게 하려는 간악한 짓이지요."
원혼의 눈에서 피눈물이 뚝뚝 떨어져 영석의 백지 위에 번졌습니다. 영석은 배수겸의 파렴치한 짓에 치가 떨렸고, 가난뱅이라 멸시당하던 자신의 설움이 겹쳐 가슴속에서 불길이 일어났지요.
"선비님, 내 비록 힘없는 시골 유생이나 그대의 한을 관박(科朴)에 담아 만천하에 드러내겠소!"
영석은 붓을 쥐고 신들린 듯 글을 써 내려갔습니다. 원혼이 읊어주는 시구는 폐부를 찌르는 명문이었고, 그 끝에는 배수겸이 작년에 훔쳐 간 글의 원작자가 누구이며 시신이 어느 우물에 버려졌는지가 은밀한 파자(破字)로 새겨졌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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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좌 앞의 폭로와 붉은 비단 신
시관들이 답안지를 거두어들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궐 안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시관들이 올린 글 중 단연 으뜸인 장원 급제자의 글에 기이한 고발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선조 임금은 즉시 영석과 배수겸을 어전 앞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조영석, 네 답안 끝머리에 적힌 '우물 속의 푸른 도포'란 구절은 대체 무엇을 뜻하느냐?"
임금의 추궁에 곁에 섰던 배수겸이 안색이 흙빛이 되어 바들바들 떨며 소리쳤습니다.
"전하! 저 산골뜨기 놈이 과거장에서 요망한 사술을 부려 조정을 능멸하고 있나이다!"
그때 영석이 배수겸을 매섭게 쏘아보며 품 안을 가리켰습니다.
"전하, 진실을 밝히시려거든 저 자의 도포 안섶을 뒤져보소서! 저 간악한 자의 품속에는 작년 과거 전날 독살당한 억울한 원혼의 붉은 비단 신 한 짝이 숨겨져 있을 것입니다!"
임금의 불호령에 금군들이 달려들어 배수겸의 멱살을 잡고 옷을 헤쳤지요. 그러자 도포 깊은 안쪽에서 부적과 함께 둘둘 말린 낡은 비단 신 한 짝이 마룻바닥으로 툭 떨어졌더랍니다.
신발 안쪽에는 붉은 실로 '충청 유생 이진우'라는 일곱 글자가 또렷이 수놓아져 있었습니다.
되찾은 정의와 날아오른 짚신
"이… 이것이 왜 내 품에…!"
배수겸은 사색이 되어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변명하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더랍니다. 한양 외곽 폐우물을 수색하자 과연 썩어가는 푸른 도포의 유골이 비단 신 한 짝만 신은 채 발견되었지요.
배수겸은 극형에 처해져 국경 너머로 귀양을 가던 중 참형을 당했고, 가문의 권세는 하룻밤 사이에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임금은 영석의 기개와 글재주를 높이 사 그를 당당히 장원 급제자로 봉하고 붉은 어사화를 하사했습니다.
어사화를 머리에 꽂은 영석이 성균관 문밖을 나설 때, 봄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왔더랍니다. 길목 허공에서 푸른 도포를 입은 청년이 영석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이며 엷은 미소를 짓고는 아지랑이처럼 흩어져 사라졌지요.
영석이 신은 낡은 짚신 코끝에는 어느새 원혼이 남겨두고 간 듯, 눈부시게 깨끗한 새 신발의 온기만이 따스하게 감돌고 있었습니다.
맺으며
억울한 귀신이 남긴 단서로 가난한 선비는 어사가 되고, 죄지은 권세가는 목숨을 잃었으니 참으로 하늘의 그물은 성겨도 빠뜨림이 없는 법이지요.
눈앞의 이익을 탐해 남의 목숨을 짓밟은 자는 결국 자신이 숨겨둔 흉물로 제 목을 조르게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 아니겠습니까?
혹시 여러분도 밤길을 걷다 주인 잃은 신발 한 짝에 얽힌 기이한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한밤중 폐가에서 홀로 바둑을 두던 귀신이 바둑판 밑에 숨겨둔 황금 백 냥의 비밀!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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