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야담

호랑이 덫에 제 발로 걸려든 나그네가 하룻밤 새 목숨을 건진 곡절

지은미소 2026. 10. 15.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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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그락, 덜컥!"

시퍼런 쇠날이 맞부딪치며 뼈를 으스러뜨리는 소리가 칠흑 같은 어둠을 찢어발겼습니다. 비명이 터져 나올 법도 하건만, 깊은 산중에 갇힌 사내는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삼켰더랍니다.

사내의 다리를 억센 이빨처럼 물고 늘어진 것은 짐승의 뼈마디도 단숨에 끊어낸다는 맹호박(猛虎縛), 즉 쇠로 만든 대형 호랑이 덫이었습니다.

눈먼 길 위의 몰락 양반

때는 숙종 대, 강원도 삼척 땅의 깊고 험한 쉰움산 자락이었습니다. 덫에 걸려 피를 흘리는 사내는 한양에 살던 몰락 양반 한진우였지요.

본래 심성이 우직하고 남을 속일 줄 모르는 진우는 노모의 약값을 구하려 삼척의 먼 친척에게 돈을 빌리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해가 서산 너머로 뚝 떨어지고 진눈깨비까지 흩날리자, 그만 호랑이가 자주 출몰한다는 험악한 짐승 길로 접어들고 만 것입니다.

"어찌 이리 운수가 사납단 말인가. 덫을 풀려 해도 빗장이 밖에서 걸려 도무지 꿈쩍을 않는구나."

진우는 이를 악물고 덫의 톱니를 벌리려 애썼으나, 장정 셋이 달라붙어도 풀기 어려운 무쇠틀은 차가운 쇠비린내만 풍길 뿐이었습니다.

더욱이 산등성이 너머에서부터 소름 끼치는 산군(山君)의 포효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으니, 가히 절체절명의 위기였지요.

어둠 속에서 나타난 포수

그때였습니다. 바스락거리는 마른 풀잎 소리와 함께 횃불 하나가 어둠을 가르고 다가왔습니다. 낡은 털모자에 삼지창을 꼬나쥔 사내, 바로 이 일대에서 덫을 놓아 호랑이를 잡던 포수 배칠성이었더랍니다.

배칠성은 본디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자로, 호랑이 가죽 한 장에 눈이 멀어 관아의 금렵 구역까지 제멋대로 덫을 놓고 다니는 악명 높은 위인이었습니다.

"게 뉘시오! 사람 살려 주시오! 내가 지나가던 길에 그만 덫을 밟고 말았소!"

진우가 반색하며 소리치자, 배칠성은 횃불을 진우의 얼굴 가까이 들이밀며 혀를 끌끌 찼습니다.

"쯧쯧, 웬 놈팽이가 비싼 쇠덫을 망쳐 놓았담? 이 덫은 늙은 암호랑이를 유인하려고 내 사흘 밤낮을 공들여 묻어둔 것이오."

"여보시오, 포수 양반. 내 사정은 나중에 들으시고 우선 이 덫부터 좀 열어주시오. 다리가 끊어질 듯 아프오!"

하지만 배칠성은 도리어 차가운 눈초리로 진우의 행색과 허리춤에 찬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훑어볼 뿐이었습니다.

"열어주는 건 어렵지 않으나, 내 덫을 망친 값과 호랑이를 놓친 삯은 받아야겠소. 그 주머니에 든 게 뭐요? 백은(白銀)이라도 들었소?"

"이것은 한양의 노모에게 전할 패물과 얼마 안 되는 노잣돈이오. 제발 목숨부터 살려주시오!"

진우의 말에 배칠성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말려 올라갔습니다. 배칠성은 도와주기는커녕 삼지창을 거꾸로 쥐고는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거참 딱하게 되었수다. 곧 바람을 타고 진짜 대호가 내려올 텐데, 사람이 물려 있으면 호랑이가 배불리 먹느라 정신이 팔리는 법이지. 내가 뒤에서 조총을 쏘기엔 딱 좋은 미끼가 생겼구려."

"네 이놈!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한단 말이냐!"

진우가 분통을 터뜨렸으나, 배칠성은 그저 비열하게 낄낄거리며 진우의 가죽 주머니를 삼지창 끝으로 낚아채어 제 품에 쑤셔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멀찍이 바위 뒤로 숨어 조총에 화약을 장전하기 시작했지요.

바람을 타고 내려온 산군

얼마 지나지 않아, 산바람이 일순간 멎고 비릿한 피비린내와 함께 숲 전체가 짓눌리는 듯한 묵직한 침묵이 찾아왔습니다.

"어흥—!"

천지를 뒤흔드는 포효와 함께,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누런 불꽃이 나타났습니다. 집채만 한 호랑이 한 마리가 바위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호랑이는 피 흘리는 진우를 발견하고는 굵은 꼬리를 땅바닥에 탁탁 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진우의 숨통을 죄어왔지요.

바위 뒤에 숨은 배칠성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조총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습니다. 호랑이가 진우의 목덜미를 무는 순간, 녀석의 미간에 총알을 박아 넣을 심산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호랑이가 별안간 코를 킁킁거리더니 고개를 홱 돌렸습니다. 호랑이의 시선이 머문 곳은 덫에 걸린 진우가 아니라,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배칠성이었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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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비린내 나는 덫의 비밀

"크르릉!"

호랑이는 진우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서운 기세로 배칠성이 숨은 바위를 향해 몸을 날렸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변고냐! 왜 나한테 덤벼드느냐!"

사색이 된 배칠성이 기겁하며 조총을 쏘았으나, 빗나간 총알은 애꿎은 나뭇가지만 꺾어놓았을 뿐이었습니다.

호랑이의 거대한 앞발이 단숨에 배칠성의 어깨를 내리쳤고, 배칠성은 비명과 함께 바닥을 뒹굴었습니다. 그리고 호랑이는 배칠성의 품에 들어있던 바로 그 가죽 주머니를 사납게 물어뜯었습니다.

그 주머니 안에는 노모의 패물뿐만 아니라, 진우가 산을 넘기 전 주막에서 요기하려고 싸 온 말린 노루간과 사향 노루의 쓸개가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배칠성이 욕심에 눈이 멀어 훔쳐 품에 넣은 그 피비린내 나는 노루간 냄새가 바람을 타고 호랑이의 코를 먼저 찔렀던 것이지요.

배칠성은 제 욕심으로 빼앗은 주머니 때문에 오히려 호랑이의 제물이 되고 만 셈이었습니다.

"사람 살려! 날 좀 살려주시오!"

배칠성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골짜기를 메웠고, 호랑이는 배칠성을 문 채 어둠 속 깊은 산등성이로 맹렬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새벽빛과 함께 풀린 족쇄

피비린내 나는 참극이 지나가고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덫의 이빨이 뼈를 비껴가 진우의 부상은 깊지 않았습니다.

아침 햇살이 숲을 비출 무렵, 총소리를 듣고 산을 수색하러 올라온 관아의 착호갑사(捉虎甲士)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진우를 발견했습니다.

"이보시오, 정신 차리시오! 아니, 이 덫은 배칠성 그 악질 포수의 쇠덫이 아닌가?"

포도부장이 급히 쇠지렛대를 가져와 덫의 빗장을 풀자, 마침내 진우의 다리가 자유를 얻었습니다.

진우는 관군들에게 간밤에 벌어진 끔찍하고도 기이한 일들을 낱낱이 고했습니다. 관군들이 호랑이가 달아난 흔적을 쫓아가 보니, 찢겨나간 배칠성의 옷자락과 함께 진우의 노잣돈 주머니가 핏자국 속에 오롯이 떨어져 있었더랍니다.

남을 미끼로 삼아 제 잇속을 채우려던 간악한 포수는 제 꾀에 넘어가 산군의 밥이 되었고, 무쇠 덫에 묶여 꼼짝없이 죽은 줄만 알았던 나그네는 그 덫 덕분에 호랑이의 첫 표적을 벗어나 목숨을 건졌으니, 세상일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요.

진우는 관아의 치료를 받아 무사히 다리를 고쳤고, 되찾은 노잣돈을 품에 안은 채 어머니가 기다리는 집으로 무사히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답니다.

맺으며

사람을 잡으려던 덫이 도리어 사람을 살리고, 재물을 탐내던 손길이 제 목숨을 앗아가는 밧줄이 되었으니 하늘의 그물은 성글어도 결코 악인을 놓치지 않는 법인가 봅니다. 삶이 궁지에 몰려 무쇠 덫에 갇힌 듯 막막할 때, 도리어 그것이 화를 피하는 방패가 되었던 경험을 겪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밤마다 관아의 곳간 쌀을 훔쳐 가는 여인의 기이한 신발 한 짝.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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