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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시절, 충청도 공주 고을의 한겨울 칼바람은 살을 에는 듯 매서웠더랍니다. 꽁꽁 얼어붙은 개천가 다리 밑에서 가마마저 멈춰 세운 이는 당대 명망 높은 예조판서 윤정협 대감이었지요. 거적때기 하나 걸치지 못하고 파랗게 질려 숨만 간신히 붙어 있던 열 살배기 사내아이를 안아 든 대감은 자신의 털도포를 벗어 아이를 꽁꽁 싸맸습니다.
"이름이 무엇이냐?"
"…이름은 없고, 그저 칠성(七星)이라 불렀구만유."
아이의 품에는 흙탕물에 찌든 나무 비녀 반 토막만이 쥐여 있었고, 뼈만 앙상한 등짝에는 끔찍한 인두 자국이 선명했더랍니다.
다리 밑 거지 아이와 자애로운 판서 대감

윤 대감은 대대로 뼈대 있는 사대부 가문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슬하에 자식이 없었지요. 대감은 칠성이의 몸을 씻기고 새 옷을 입힌 뒤 족보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렸으니, 바로 윤득수(尹得秀)였습니다. 종들은 수군거렸고 집안 친척들은 근본 없는 천한 종놈의 씨를 들였다며 혀를 찼지만 대감의 뜻은 완고했더랍니다.
"하늘이 내게 늦게나마 보내 준 피붙이니라. 득수야, 너는 이제 노비가 아니라 이 윤가의 장손이다."
득수는 그 은혜가 망극하여 눈물로 밤을 지새웠고, 밤낮으로 글공부와 활쏘기에 매진했습니다. 대감은 득수에게 늘 "남의 눈물을 닦아주는 선비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고, 아이가 다리 밑에서 쥐고 있던 낡은 반 토막 나무 비녀를 작은 비단 주머니에 담아 늘 차고 다니게 했지요.
욕심 많은 당질의 칼날 같은 눈빛

세월이 흘러 득수가 장성하여 헌헌장부의 기개를 갖추어 갈 무렵, 윤 대감의 건강이 급격히 쇠약해졌습니다. 그러자 대감의 당질, 즉 사촌 형의 아들인 윤태식이 슬그머니 공주 사저로 기어들기 시작했지요. 윤태식은 본디 투전판을 전전하며 가문의 재산을 탕진하던 망나니였으나, 윤 대감의 막대한 전답과 기와집을 차지하려는 탐욕에 눈이 멀어 있었습니다.
"숙부님, 어찌 저런 개천가에서 주워 온 종놈 녀석에게 가문의 대를 물리려 하십니까? 피 한 방울 안 섞인 놈입니다!"
윤태식이 마룻바닥을 치며 악을 쓰자, 병상에 누운 윤 대감은 기침을 토하며 차갑게 꾸짖었더랍니다.
"닥쳐라, 태식아! 득수는 내 아들이다. 네놈의 탐욕은 썩은 물보다 악취가 나는구나. 썩 물러가거라!"
태식은 이를 갈며 문을 박차고 나갔고, 득수를 죽일 듯 노려보며 속으로 서늘한 음모를 꾸몄습니다.
대감의 급서와 사라진 유언장

눈보라가 몰아치던 어느 날 밤, 윤 대감은 결국 병환을 이기지 못하고 홀연히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장례가 끝나자마자 윤태식은 험상궂은 장정들을 사저 안마당으로 불러 모았지요.
"숙부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내게 남기신 진짜 유언장이 여기 있다!"
태식이 흔들어 보인 종이에는 '가문의 모든 재산은 조카 윤태식에게 물려주고, 근본 모를 득수는 멍석에 말아 내쫓거나 본래 신분대로 관노로 보내라'는 글이 대감의 도장과 함께 찍혀 있었습니다.
"거짓입니다! 아버님께선 결코 그런 말씀을 하실 분이 아닙니다!"
득수가 피를 토하듯 소리쳤으나, 태식은 가소롭다는 듯 비웃으며 득수의 멱살을 잡았습니다.
"시끄럽다, 종놈 주제에 대감의 은혜를 입더니 눈에 뵈는 게 없구나! 당장 저놈을 포박하여 관아에 패륜죄로 고발하라!"
장정들이 달려들어 득수를 결박하려던 찰나, 공주 목사가 포졸들을 이끌고 대문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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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인된 자개함과 반 토막 나무 비녀
"멈추어라! 윤 판서 대감께서 생전에 내게 직접 맡기신 밀봉 유언장이 있느니라!"
목사의 호통에 마당은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고, 태식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습니다. 목사는 비단에 싸인 자개함을 꺼내 놓으며, 대감이 남긴 마지막 서찰을 소리 높여 낭독했지요.
"‘내 사후에 탐욕스러운 친족이 득수를 쫓아내려 할 것이니, 이 자개함을 열어 진실을 밝혀라. 이 함은 오직 득수가 품에 지닌 반 토막 나무 비녀를 맞추어야만 열릴 것이다.’"
득수는 떨리는 손으로 품속의 비단 주머니에서 열 살 때부터 지녀 온 그 낡은 나무 비녀를 꺼냈습니다. 자개함 윗면의 흠집에 득수의 비녀를 갖다 대자, 놀랍게도 꼭 들어맞으며 딸깍하고 함의 뚜껑이 열렸더랍니다. 그 안에는 윤 대감의 친필 서책과 함께 관아의 오랜 호적 문서가 들어 있었습니다.
드러난 진실, 핏줄의 비밀
목사가 함 속의 문서를 펼쳐 읽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 아이는 주워 온 종놈이 아니다. 스무 해 전, 역모의 누명을 쓰고 참화를 겪었던 내 친아우 정원의 유일한 핏줄, 내 조카이니라!"
과거 윤 대감의 아우는 억울한 모함을 받아 집안이 풍비박산 났고, 젖먹이 아들을 살리기 위해 비녀를 쪼개어 품에 넣어 여종에게 맡겨 피신시켰던 것이지요. 그 아우의 누명이 벗겨진 뒤에도 아이를 찾지 못해 애를 태우던 윤 대감은, 다리 밑에서 그 비녀와 아우를 빼닮은 아이의 얼굴을 보고 단번에 친조카임을 알아채고 양자로 거두었던 것입니다.
"아우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평생을 괴로워했으나, 이제야 내 피붙이를 온전히 가문의 주인으로 세운다. 아울러 내 아우를 거짓 고변하여 죽음으로 몰아넣고 가문을 파탄 낸 원흉은, 바로 사촌 형 윤진과 그의 아들 윤태식이다!"
대감은 죽기 전 이미 태식의 부친이 저지른 과거의 대역죄와 사기 행각에 대한 명백한 증좌를 모아 함 속에 함께 봉인해 두었던 것이었지요.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숙부가 날 모함한 것이다!"
태식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 했으나, 목사의 명을 받은 포졸들이 즉각 태식을 덮쳐 오랏줄로 꽁꽁 묶었더랍니다.
맺으며
윤태식은 위조된 유언장과 과거 가문을 도륙 낸 부친의 죄가 낱낱이 밝혀져 변방의 외딴섬으로 유배형에 처해졌고, 득수는 비로소 억울하게 죽은 친부모의 한을 풀고 윤 대감의 뜻을 이어 백성을 굽어살피는 어진 관리가 되었지요. 비바람 치던 겨울 개천가에서 맺어진 인연은 핏줄보다 깊은 자애와 정의로 마침내 활짝 꽃을 피웠더랍니다. 여러분도 곁에 있는 인연이 혹 하늘이 맺어준 기막힌 운명은 아닌지 돌아본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한밤중 외딴 산막을 찾아와 피 묻은 버선을 벗어놓고 간 처녀 귀신의 눈물겨운 사연이 이어집니다.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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