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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임금 치세의 어느 늦가을 밤이었습니다. 인적이 끊긴 야심한 시각, 경기도 남한산성 성벽 아래 외딴 주막에서는 화톳불 연기가 쉼 없이 피어오르고 있었지요.
큰 가마솥 안에서는 쇠갈비와 전복, 해삼, 배추속대, 표고버섯이 한데 엉겨 은은한 육수 냄새를 뿜어냈습니다. 바로 한양 사대부들이 새벽종이 울릴 때마다 문갑을 열고 찾는다던 새벽 해장국, 효종갱(曉鐘羹)을 끓여내는 중이었더랍니다.
남한산성의 백정과 얼어붙은 솜옷

이 주막을 지키는 이는 손맛 하나로 산성 안팎에 이름을 떨친 백정 출신 국밥 장수, 장덕수였습니다. 그는 거친 손과 묵묵한 성미를 지녔으나, 밤마다 끓인 뜨거운 국을 두꺼운 옹기에 담아 솜옷으로 꽁꽁 싸맨 뒤 한양 북촌까지 날라 보내는 성실한 사내였지요.
덕수의 바람은 오직 하나, 억울하게 관아의 종으로 끌려간 누이동생을 속량할 돈 오십 냥을 모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가 밤잠을 줄여가며 한양 사대부들에게 탕국을 배달한 까닭도 바로 그 피눈물 나는 돈을 모으기 위함이었지요.
"덕수야, 사대문 열리자마자 정승 댁에 닿아야 한다. 식으면 양반님들 입맛만 버려."
"염려 마시오, 숙부. 솜옷을 세 겹이나 둘렀으니 성문이 열릴 때까지도 김이 풀풀 날 게요."
덕수는 국이 가득 찬 항아리를 등짐에 단단히 묶으며 이마의 땀을 훔쳤습니다.
재상의 집마당에 쏟아진 핏빛 국물

다음 날 새벽, 한양 도성의 파루(罷漏)를 알리는 서른세 번의 종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성문이 삐걱거리며 열리자마자 마구 달려간 덕수는 북촌의 세도가이자 소론의 영수인 조 참판 댁 사랑채 뒷문에 옹기를 내려놓았지요.
그런데 그날 아침, 참판 댁 사랑채가 발칵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조 참판이 효종갱을 한 숟가락 뜨려던 찰나, 마당에 있던 삽살개가 먼저 핥아먹은 국물 한 모금에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서 즉사한 것이었지요.
"비상(砒霜)이다! 국에 맹독이 들었다!"
"네놈이 감히 대감마님을 시해하려 하였구나! 저 백정 놈을 당장 결박하라!"
참판 댁 청지기와 포교들이 덕수를 덮쳤습니다. 덕수는 영문도 모른 채 포승줄에 묶여 마당 바닥에 처박혔지요.
"대감마님, 저는 그저 고기와 해물을 삶아 넣었을 뿐 독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억울합니다!"
"닥쳐라, 천한 놈! 어디서 흉계를 꾸미고 거짓을 고하느냐!"
덕수의 등 뒤로 서슬 퍼런 곤봉이 사정없이 내리꽂혔습니다.
옥사에서 발견된 붉은 인주 자국

덕수는 포도청 지하 옥사에 갇혀 모진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때 그의 앞에 나타난 이는 조 참판의 먼 친척이자 형조의 실력자로 통하던 배 판관이었습니다. 배 판관은 조 참판이 사라지면 막대한 문중의 토지와 권세를 물려받기로 되어 있던 탐욕스러운 사내였지요.
"장덕수라 했느냐. 네 누이의 목숨까지 무사하길 바란다면, 남인의 사주를 받고 독을 넣었다고 순순히 자복하거라."
"판관 나으리, 저는 정쟁 따위는 모릅니다. 누이를 살리려고 피땀 흘려 끓인 국에 어찌 비상을 넣는단 말입니까!"
배 판관은 싸늘하게 웃으며 돌아섰지만, 덕수는 그가 옥문을 나설 때 소매에서 떨어진 하얀 종이쪽지 하나를 발끝으로 낚아챘습니다. 종이에는 산성 주막의 옹기를 사들이라 적힌 글귀와 함께, 진한 붉은색 인주 자국이 찍혀 있었더랍니다.
그 인주는 일반 사대부가 쓰는 인주가 아니라 오직 배 판관 집안에서만 쓰는 귀한 사향 향이 배어 나오는 자줏빛 인주였지요. 덕수는 그 종이를 제 버선 속에 깊숙이 숨겼습니다.
새벽을 밝힌 옹기의 입구

조 참판이 직접 옥사로 찾아와 친국을 벌이던 날이었습니다. 배 판관은 의기양양하게 덕수의 참형을 청하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대감, 저 간악한 백정 놈이 자복을 거부하니 당장 능지처참하여 종묘사직의 기강을 세워야 합니다!"
그때 피투성이가 된 덕수가 조 참판을 향해 고개를 번쩍 들고 외쳤습니다.
"대감마님! 억울함을 밝혀 주십시오! 제 옹기 뚜껑을 살펴보셨습니까!"
"옹기 뚜껑이라니? 그게 무슨 해괴한 소리냐?"
"제가 산성에서 배달하는 효종갱 항아리는 뚜껑 틈을 찹쌀 풀과 한지로 봉하고, 그 위에 제 놋쇠 도장을 찍어 밀봉합니다. 남한산성을 출발할 때 풀이 뜯겨 있었다면 한양까지 오는 동안 국물이 다 쏟아졌을 것입니다!"
조 참판의 눈빛이 흔들렸습니다. 덕수는 품속에서 피 묻은 종이쪽지를 꺼내 바닥에 내던졌습니다.
"참판 댁 뒷간 행랑채에서 국을 건네받은 자가 누구였습니까! 뚜껑의 밀봉을 칼로 베어내고 다시 바른 자의 손에, 바로 저 사향 인주와 독약 가루가 묻어 있었을 것입니다!"
냄비 속의 진실과 죗값
조 참판은 즉시 덕수가 배달했던 옹기 뚜껑을 가져오라 일렀습니다. 옹기 뚜껑 안쪽의 찹쌀 풀은 거칠게 뜯겨 나간 뒤 관아의 일반 풀로 덧칠해져 있었고, 그 틈새에는 배 판관의 하인이 흘린 붉은 사향 인주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지요.
배 판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습니다. 참판 댁 뒷문에서 효종갱을 넘겨받아 참판의 밥상에 올리기 전, 몰래 독을 타고는 백정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던 배 판관의 간계가 백일하에 드러난 순간이었더랍니다.
"네 이놈! 동족의 피를 나눈 나를 죽이고 가문을 집어삼키려 백정의 정성 어린 탕국까지 더럽혔단 말이냐!"
조 참판의 노호가 옥사를 뒤흔들었습니다. 배 판관과 그의 수하들은 그 자리에서 포박되어 절해고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고, 전답은 모두 몰수되었지요.
조 참판은 덕수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은 물론, 그의 정직함과 지혜를 높이 사 누이동생을 당장 양인으로 면천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한산성 주막에 큰 은전 백 냥을 하사하여 그를 도성 안팎에서 으뜸가는 국밥 장수로 소문나게 해 주었지요.
맺으며
차가운 새벽바람을 가르며 남한산성에서 한양까지 달리던 효종갱 항아리는, 한 백정의 애타는 가족 사랑과 악인의 검은 탐욕을 가려내는 거울이 되어 주었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뒤로 새벽종이 울릴 때마다 배달되어 오는 뜨끈한 국 한 그릇을 보며, 삿된 욕심은 언젠가 맑은 탕국물 앞에서도 제 부끄러운 낯을 드러내고 만다는 사실을 되새기곤 했지요.
혹여 여러분도 살을 에는 찬 바람 부는 새벽녘, 누군가의 억울함을 씻어주고 속을 덥혀 주던 그 뜨거운 국물 냄새를 맡아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보름달 뜨는 밤마다 우물 속에서 은전이 쏟아져 나온다던 박 진사 댁의 해괴한 비밀.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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