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야담

피 묻은 편지 한 장을 품고 대호의 목을 겨눈 사내의 정체

지은미소 2026. 10. 18.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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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유난히도 사납게 울부짖던 단종 원년 시월의 그믐밤이었지요. 한양 돈의문 밖 서대문골 김종서 대감의 저택 둘레로 불길한 그림자가 소리도 없이 스며들었습니다.

그림자의 주인은 다름 아닌 수양대군이었고, 그 곁에는 서슬 퍼런 쇠몽둥이를 품에 숨긴 심복 임어을운이 도사리고 있었더랍니다. '백두산 호랑이'라 불리던 좌의정 김종서를 쓰러뜨리지 않고서는 결코 천하를 거머쥘 수 없다는 탐욕이 빚어낸 핏빛 밤이었습니다.

어둠 속에 숨겨진 편지 한 장

수양대군의 측근 중에는 묵묵히 칼을 갈던 '한치복'이라는 젊은 별무사가 있었지요. 과묵하고 날랜 몸놀림으로 수양의 눈에 들어 이번 거사의 호위 무사로 발탁된 사내였습니다.

치복에게는 수양이 내린 은밀하고도 무거운 밀명이 하나 더 있었더랍니다.

"대호가 몽둥이에 맞아 쓰러지거든, 숨이 끊어지기 전에 놈의 가슴팍을 갈라 이 편지를 품 안에 밀어 넣어라. 안평대군과 역모를 꾀했다는 사통 문서이니라."

수양은 옥새를 흉내 내어 파낸 가짜 도장이 찍힌 위조 서찰을 치복의 손에 쥐여주며 비열하게 웃었습니다.

"치복아, 대호의 숨통을 확실히 끊고 이 서찰만 넣어두면, 내 너를 당상관에 앉히고 평생의 부귀를 보장하마."

호랑이의 문전에서 울린 비명

대문 앞에 당도한 수양대군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김종서를 불러냈더랍니다.

"황보인 대감의 편지를 전하러 왔으니 잠시 문을 열어 주시오!"

의심을 거두지 않은 채 사립문 밖으로 걸어 나온 김종서 대감은 비록 노구였으나 기골이 장대하고 눈빛이 형형했지요. 어둠 속에서 편지를 받아 들여 고개를 숙인 바로 그 찰나, 뒤에 숨어 있던 임어을운이 쇠몽둥이를 번쩍 치켜들었습니다.

"퍽!"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붉은 피가 허공으로 솟구쳤고, 거목 같던 대감이 휘청거리며 비탈진 마당 바닥으로 쓰러졌습니다.

"치복아, 뭣하느냐! 어서 다가가 목을 베고 역모의 서찰을 품에 쑤셔 넣어라!"

수양의 서릿발 같은 호통이 골목길을 찢어발겼습니다.

대호의 목덜미와 녹슨 은가락지

치복은 번뜩이는 비수를 꺼내 들고 피투성이가 된 채 엎드려 헐떡이는 김종서 대감의 목덜미로 다가갔습니다. 차가운 칼날을 들이대는 치복을 향해, 피를 토하던 대감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떨리는 손으로 치복의 소매를 콱 움켜쥐었지요.

그 순간, 대감의 손가락 사이로 낡은 가죽 끈에 꿰어진 '녹슨 은가락지' 하나가 툭 떨어져 내렸더랍니다. 치복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습니다.

그 은가락지는 십 년 전, 북방 육진의 여진족 토벌 때 몰살당할 뻔한 함경도 국경 마을에서 대감이 홀로 살아남은 한 어린 소년에게 쥐여주었던 목숨값이었기 때문입니다.

"살아서 나라의 기둥이 되어라."

그 어린 소년이 바로 이름을 바꾸고 한양으로 숨어들어온 치복 자신이었지요.

어둠 속을 가른 역전의 칼날

치복은 수양대군이 맡겼던 가짜 편지를 대감의 품에 넣는 척하며, 재빨리 자신의 도포 안쪽 깊은 곳으로 도로 쑤셔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품에서 전혀 다른 종이 한 장을 꺼내 피 묻은 땅바닥에 내던졌지요.

그것은 수양대군이 거사를 위해 사병들을 소집하며 김종서를 암살하라고 치복 자신에게 내렸던 친필 밀지였습니다.

"대군, 일이 끝났습니다! 대호가 절명했습니다!"

치복이 대감의 목덜미 대신 땅바닥을 세게 내리치며 피를 묻힌 칼을 치켜들고 외쳤더랍니다.

방심한 임어을운과 수양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대궐로 말을 몰기 위해 돌아선 그 찰나, 치복은 품고 있던 비수를 빼어 김종서의 시신을 밟고 지나가려던 수양의 말 다리를 매섭게 베어 넘겼습니다.

"히히힝!"

말이 비명을 지르며 곤두박질쳤고, 혼비백산한 수양 일파가 어둠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 치복은 쓰러진 김종서를 들쳐업고 칠흑 같은 골목길 저편으로 내달렸더랍니다.

맺으며

훗날 수양대군은 끝내 정권을 잡았으나, 그날 밤 김종서의 품에서 나와 조정에 폭로된 수양의 친필 밀지 탓에 대의명분을 잃고 평생 찬탈자라는 씻을 수 없는 오명을 짊어져야 했지요. 한편 목숨을 건진 노재상은 충직한 옛 소년의 등에 업혀 깊은 산골로 자취를 감추었으니, 탐욕에 눈먼 권력자라도 하늘이 맺어준 질긴 은혜의 고리는 결코 끊어내지 못한 셈입니다.

은혜를 갚기 위해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도 주저 없이 몸을 던졌던 충신과 의인들의 기막힌 사연을 여러분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사흘 전, 궁궐 우물에서 건져 올린 기괴한 붉은 궤짝의 비밀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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