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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물이 성난 용처럼 울부짖으며 암초를 때리던 그날 아침, 진도 울돌목의 물살은 마치 피를 갈구하듯 붉은 안개를 머금고 소용돌이쳤습니다. 열두 척의 배로 백삼십 척이 넘는 왜적의 대함대를 마주해야 했던 절체절명의 날, 조선 수군의 진영 뒤편에선 아무도 모르는 칼날이 번뜩이고 있었지요.
어둠 속의 밀담과 세 닢의 엽전

선조 삼십 년 정유재란의 불길이 남쪽 바다를 집어삼키던 때, 전라도 해남의 벽파진 포구 주막 뒤편에 음산한 그림자 둘이 마주 섰더랍니다.
"장군이 죽어야 이 전쟁이 끝나고, 그래야 자네도 살고 나도 산다네."
탐욕스런 눈빛의 군관 배상호가 쉰 목소리로 속삭이며 은화 주머니를 내밀었습니다. 배상호는 왜적의 기세에 겁을 집어먹고 이미 왜장 구루시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간세였습니다.
그의 맞은편에 선 사내는 본래 통제영의 쇠줄 다루는 기술자이자 격군으로 징집된 최달석이었습니다. 달석은 왜란 때 아내와 젖먹이 딸을 왜놈들의 칼에 잃고 오직 복수만을 꿈꾸며 살아온 거친 뱃사람이었지요.
"내 시키는 대로 울돌목 암초 사이에 걸어둔 철쇄를 적선이 들어올 때 끊어버려라. 그러면 왜군이 통제사의 기함을 단숨에 들이받을 터이니."
달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배상호가 건넨 은화 주머니를 받더니, 자신의 품에서 가운데 구멍이 찌그러진 엽전 세 닢을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약조를 잊지 마십시오, 나으리. 이 표식을 든 자는 살려준다는 왜장의 맹세를 믿겠습니다."
바다 위의 외로운 성채

결전의 날, 정유년 구월 십육일의 아침 해가 솟아올랐습니다. 저 멀리 바다를 가득 메운 왜선의 돛대가 숲을 이루며 조수를 타고 밀려오기 시작했더랍니다. 조선 수군의 배 열두 척은 뒤로 물러서며 굳어 있었고, 오직 이순신 장군이 탄 대장선만이 홀로 앞으로 나아가 왜적의 선봉을 가로막았습니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장군의 사자후가 바다를 울렸으나, 왜선 수십 척이 벌떼처럼 기함을 에워싸자 사졸들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때 배상호는 기함의 뒤쪽 지휘선에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달석에게 신호를 보냈습니다.
"바위에 걸린 쇠사슬을 끊어라! 어서!"
달석은 암초 뒤편에 묶인 배에 올라타 묵직한 도끼를 치켜들었습니다. 배상호는 이제 장군의 기함이 격침되고 조선 수군이 와해되면 왜장에게 큰 벼슬과 황금을 얻을 생각에 입꼬리를 올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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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힌 깃발과 비명
그러나 도끼를 든 달석의 눈빛은 비열한 배신자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달석은 쇠사슬을 내리치는 척하며 암초 뒤에 숨겨두었던 붉은 신호 깃발을 높이 쳐들었습니다.
그 순간, 쇠사슬이 끊어지기는커녕 물밑에서 팽팽하게 솟구쳐 오르며 울돌목의 좁은 목을 가로질렀습니다. 조류를 타고 무서운 속도로 돌진하던 왜군의 선봉선들이 보이지 않는 쇠사슬과 거친 암초에 연달아 걸려 박살이 나기 시작했더랍니다.
"네놈이 어찌 감히! 사슬을 끊으라 하지 않았더냐!"
경악한 배상호가 칼을 뽑아 들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달석은 차가운 웃음을 터뜨리며 품에서 아까의 그 찌그러진 엽전 세 닢을 바다로 던져버렸습니다.
"왜놈에게 빌붙어 동포를 팔아먹은 버러지 같은 놈! 내 처자식을 죽인 원수 놈들에게 내 손으로 길을 터줄 성싶더냐?"
애초에 달석은 통제사 이순신 장군을 은밀히 찾아가 배상호의 역모를 낱낱이 고했던 것입니다. 장군은 달석의 충심을 알아보고, 도리어 배상호를 안심시켜 왜선의 진입 시기와 방향을 완벽히 유인하는 미끼로 삼았던 것이지요.
역류하는 물살과 천벌
조수가 바뀌어 물살이 왜군 쪽으로 거세게 역류하기 시작하자, 바다는 지옥의 도가니로 변했습니다. 장군의 기함에서 뿜어져 나온 현자포와 지자포의 불기둥이 뒤엉킨 왜선들을 산산조각 내었습니다. 적장 구루시마의 목이 베어져 대장선 돛대에 걸리자 백삼십 척 왜선은 공포에 질려 달아나다 저희끼리 부딪쳐 침몰했더랍니다.
혼란을 틈타 작은 나룻배를 타고 도망치려던 배상호의 눈앞에 피투성이가 된 달석이 나타났습니다.
"달석아, 살려다오! 내가 모은 금괴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마!"
달석은 대답 대신 배상호의 배를 묶은 밧줄을 도끼로 단숨에 끊어버렸습니다.
"저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은 우리 백성들의 원혼에게나 용서를 빌어라!"
노도 잃고 닻도 없는 배상호의 배는 무서운 회오리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바위벽에 부딪혀 흔적도 없이 부서져 버렸습니다.
맺으며
울돌목의 붉은 파도가 잦아들 무렵, 바다 위에는 부서진 왜선의 잔해만이 가득했더랍니다. 홀로 바위에 선 달석은 품에서 아내의 때 묻은 저고리 고름을 꺼내 쥐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지요. 나라를 지키고자 목숨을 던진 이름 없는 민초들의 피눈물이 모여 마침내 기적 같은 승리를 빚어낸 날이었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가슴속 깊은 원한을 도리어 큰 충의로 바꾸어 나라를 구한 백성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한밤중 관아의 담을 넘어온 정체불명의 여인과 피 묻은 옥반지의 비밀이 밝혀집니다.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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