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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어둑 땅거미가 질 무렵, 한양으로 통하는 문경새재 주막거리 바닥에 열네 살 배기 소년이 풀썩 무릎을 꿇었더랍니다. 흙먼지투성이인 손에는 깨진 사기그릇과 말라비틀어진 칡뿌리 세 토막이 쥐어져 있었지요. 지나가던 행인들이 혀를 끌끌 차며 동전 한 푼을 던져주려 하자, 아이는 그 돈을 마다하고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목놓아 울부짖었습니다.
"나리들, 적선은 필요 없습니다! 제 몸뚱이를 팔 테니 부디 한양 명의에게 보일 은 스무 냥만 빌려주십시오!"
삼천 리 길을 나선 지게꾼

때는 조선 숙종 18년, 충청도 제천 땅에 살던 박달이라는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달이는 일찍이 아비를 여의고,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어미와 단둘이 숯을 굽고 나물을 뜯어 겨우 입에 풀칠을 해왔지요. 그런데 그해 봄, 어미가 지독한 열병을 앓은 뒤로 눈에서 시커먼 피고름이 흐르며 목숨이 경각에 달렸더랍니다.
고을 의원이 혀를 내두르며 말하길, "한양 종로의 유 의원에게 백두산 설삼을 구해 달이지 않으면 며칠 넘기지 못할 것이다. 허나 그 약값만 해도 은 스무 냥은 족히 든다"고 하였습니다. 가난뱅이 숯장이 모자에게 은 스무 냥은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거금이었지요.
달이는 어미의 여윈 손을 쥐며 다짐했습니다. "어머니, 제가 한양 가서 반드시 약을 지어 오겠습니다. 이 지팡이를 꼭 쥐고 며칠만 참으셔요." 달이는 아버지가 생전에 남겨준 낡은 대추나무 비녀 하나를 품에 소중히 넣고, 짚신 세 켤레를 허리춤에 찬 채 무작정 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도둑으로 몰린 품팔이 소년

보름 밤낮을 걸어 마침내 한양에 당도한 달이는 유 의원 약방 문을 두드렸으나, 은 스무 냥이 없이는 문턱조차 넘을 수 없었지요. 낙담한 달이가 종로 거리를 헤매다 들어간 곳은 운종가의 큰 비단 상단, 배만 불룩 나온 거상 마칠복의 행랑채였습니다.
"마 행수님, 무슨 일이든 다 하겠습니다. 마구간 똥을 치우든 땔감을 해오든 뼈가 부스러져라 일할 테니 제발 약값만 가불해 주십시오!"
달이가 흙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간청하자, 마칠복은 탐욕스런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습니다. "네 정성이 갸륵하구나. 마침 뒤뜰 광에 쌓인 땔나무를 정리하고 장작을 다 패면 은 스무 냥을 내어주마." 달이는 눈물을 흘리며 밤을 새워 거대한 장작더미를 패고 쪼개어 쌓았더랍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삯을 청하러 간 달이 앞에 돌아온 것은 모진 몽둥이질이었습니다. 마칠복이 수하들을 부려 달이를 포승줄로 결박하며 소리쳤지요.
"이 천하의 도둑놈아! 내 안방에 둔 청옥 노리개를 네놈이 훔쳐 품에 넣은 것을 보았다! 관아에 넘겨 목을 베어버리기 전에 썩 꺼지지 못할까!"
지옥에서 나타난 구원의 손길
달이가 품고 있던 것은 어미에게 주려던 대추나무 비녀뿐이었으나, 마칠복의 하인들은 그것마저 길바닥에 내팽개치고 짓밟았습니다. 억울함에 피를 토하듯 울부짖는 소년의 비명 소리에 마침 거리를 지나던 가마 하나가 멈추어 섰지요.
가마 문이 열리고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내렸는데, 바로 조정의 좌의정을 지내고 낙향한 한명인 대감이었습니다. 한 대감은 흙투성이가 된 소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나지막이 물었습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비단 장수 문전에서 저리 패악질을 당하고 있느냐?"
"대감마님, 저는 도둑질을 하지 않았습니다! 충청도 제천에서 눈먼 어미의 약값을 벌러 온 박달이라 하옵니다. 장작을 패주면 약값을 준다기에 밤새 일했더니 도리어 도둑 누명을 씌웁니다!"
달이가 서럽게 울며 땅바닥에 떨어진 대추나무 비녀를 소중히 품에 안자, 한 대감의 눈빛이 일순 번쩍였습니다. 대감은 흙 묻은 비녀 끝에 조각된 희미한 '구름 운(雲)' 자를 보더니, 마칠복을 향해 서늘한 목소리로 꾸짖었지요.
"네놈의 간악한 술수를 내 모를 줄 아느냐! 이 아이는 오늘부터 내 집의 손님이니, 한 번만 더 혀를 놀리면 네 상단을 한양 땅에서 영원히 지워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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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 댁 제사상의 비밀
한 대감은 달이를 자신의 웅장한 저택으로 데려가 따뜻한 밥을 먹이고, 백두산 설삼과 함께 은 서른 냥을 선뜻 내어주었습니다. 달이는 엎드려 통곡하며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합니까" 하고 물었지요. 그러자 한 대감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뜻밖의 부탁을 하나 했습니다.
"오늘 밤이 내 먼저 간 아우의 기일이다. 사당 제사상 뒤편 병풍 뒤에 숨어, 자시(밤 11시~새벽 1시)가 될 때까지 무슨 소리가 나도 숨을 죽이고 가만히 엎드려 있거라. 그것이 내게 갚을 삯이다."
달이는 영문을 몰랐으나 은혜를 갚기 위해 시키는 대로 병풍 뒤에 웅크리고 숨었더랍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밖에서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제당 문이 삐걱 열렸습니다. 향로 연기 너머로 들어선 이는 뜻밖에도 낮에 자신을 모함했던 비단 장수 마칠복이었습니다.
마칠복은 제사상 앞에 놓인 술잔에 주머니에서 꺼낸 은밀한 가루를 털어 넣으며 히죽거렸지요. "영감탱이, 이 비상 든 독주를 마시고 오늘 밤 아우 곁으로 가시오. 그러면 그 막대한 전답과 상단 권리가 모두 내 손에 들어올 테니."
바로 그때, 병풍 뒤에 있던 달이가 온몸을 던져 제사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제사상이 엎어지고, 독이 든 술잔이 바닥에 박살 나며 마룻바닥이 하얗게 타들어 갔지요.
"이놈! 대감마님을 해치려 하다니!" 달이가 마칠복의 멱살을 잡고 늘어졌고, 곧이어 횃불을 든 무관들과 한 대감이 문을 박차고 들이닥쳤습니다.
비녀가 밝혀낸 피눈물의 진실
마칠복은 포졸들에게 결박당한 채 사시나무 떨듯 떨며 주저앉았습니다. 한 대감은 바닥에 쏟아진 독주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달이의 어깨를 감싸 안았습니다.
"칠복아, 내 아우가 십 년 전 의문의 병으로 급사했을 때도 네놈이 그 곁에 있었지. 아우의 유산을 가로채 상단을 차린 것도 모자라 나까지 독살하려 하였느냐?"
마칠복이 고개를 조아리며 변명하려 들자, 대감은 달이의 품에서 그 낡은 대추나무 비녀를 꺼내어 보였습니다.
"이 비녀는 십 년 전 관직을 버리고 숨어 산 내 친동생, 운(雲) 자를 쓰던 한명운의 가보이다. 도둑맞은 줄로만 알았던 이 비녀를 이 아이가 품고 있는 것을 보고, 내 아우의 피붙이가 살아있음을 단박에 알았다!"
그렇습니다. 달이의 아버지는 과거 마칠복의 배신과 모략을 피해 충청도 산골로 숨어들었던 한 대감의 친아우였고, 병으로 눈이 먼 달이의 어미는 바로 한 대감의 제수였던 것입니다. 마칠복은 십 년 전 빼앗지 못한 가문의 마지막 징표인 비녀를 달이의 품에서 보고, 정체가 탄로 날까 두려워 소년을 도둑으로 몰아 없애려 했던 것이었지요.
포도청으로 끌려간 마칠복은 대역죄와 살인미수로 참형에 처해졌고, 그의 가산은 모두 몰수되었습니다. 달이는 삼정승 댁 귀한 손자로 밝혀져 관아의 어의를 대동하고 고향 제천으로 금의환향하였지요. 지극한 효심으로 구한 약재 덕에 어미는 거짓말처럼 눈을 뜨고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답니다.
맺으며
피는 물보다 진하고 지극한 정성은 하늘도 감동시킨다더니, 어미를 살리려던 아이의 눈물겨운 발걸음이 결국 가문의 원수를 갚고 제 핏줄을 찾는 길잡이가 되었던 셈이지요. 여러분의 고향에도 이처럼 어둠 속에서 등불처럼 기적을 부른 효자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한밤중 폐가에 버려진 옹기 항아리 속에서 매일 밤 들려오는 여인의 웃음소리, 그 기괴한 비밀이 밝혀집니다.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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