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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안에 은자 스무 냥을 마련치 못하면 네 어미의 눈은 영영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의원 송낙원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쓰러져 가는 초가삼간을 쨍쨍 울렸습니다. 열아홉 먹은 처녀 은실은 방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피눈물을 삼켰더랍니다.
비단보에 싸인 은비녀

숙종 임금 치세, 전라도 남원 고을 끄트머리에는 병든 노모와 단둘이 살아가는 백정의 딸 은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은실은 비록 신분은 미천했으나 품성이 곱고 손재주가 빼어나 마을 어귀의 가난한 훈장 댁 도령 윤서와 장래를 약조한 사이였지요. 은실에게는 목숨보다 귀한 보물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생전에 남겨 준 옥색 비단보와 그 안에 든 은비녀였습니다.
비녀 머리에는 정교하게 파인 모란꽃 한 송이와 '덕(德)' 자가 작게 새겨져 있었지요. 이는 가난한 살림에도 혼례 때 머리에 얹으라며 아버지가 남겨 준 유일한 혼수 밑천이었습니다. 은실은 밤마다 노모 몰래 이 비녀를 꺼내 보며 고운 혼례복을 입을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더랍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요. 보름 전부터 노모의 두 눈에 핏발이 서더니 급기야 앞을 전혀 보지 못하고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습니다. 고을의 소문난 욕심쟁이 의원 송낙원을 찾아가 엎드렸으나, 돌아온 대답은 피눈물 나는 호통뿐이었습니다.
욕심쟁이 의원의 검은 속내

"중원에서 들여온 귀한 환약이라 은자 스무 냥 밑으로는 반 푼어치도 내줄 수 없다!"
송낙원은 고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구두쇠이자 욕심꾸러기였습니다. 환자 목숨을 담보로 터무니없는 약값을 뜯어내기로 악명이 자자했지요. 은실이 눈물로 애원하자, 송낙원의 눈이 번뜩였습니다.
"듣자 하니 네게 선친이 물려준 제법 번듯한 은비녀가 있다지? 그걸 가져오너라. 내 특별히 은자 스무 냥으로 쳐서 약을 지어 줄 터이니."
은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아버지가 남겨 준 마지막 유품이자 자신의 혼수를 어찌 내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방 안에서 고통으로 앓는 노모의 신음이 문풍지를 뚫고 들려왔습니다.
"아가… 애미 걱정 말고 네 혼사나 준비해라… 나는 이대로 눈 감아도 여한이 없다…"
노모의 메마른 손을 잡은 은실은 피눈물을 흘리며 결심했습니다. 제 한 몸의 행복과 혼수가 어찌 어머니의 눈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은실은 옥색 비단보를 들고 송 의원의 약방으로 달려갔습니다.
약방 뒤뜰에 버려진 진실
"여기 비녀와 비단보를 가져왔습니다. 부디 저희 어머니를 살려주십시오."
송낙원은 은비녀를 채가듯 받아 들고는 이리저리 살피더니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습니다. 비녀의 무게와 순도를 확인한 그는 낡은 종이에 싼 검은 환약 세 알을 툭 던져 주었습니다.
"사흘 동안 하루 한 알씩 달여 먹여라. 그러면 차도가 있을 게다."
은실은 환약을 품에 안고 엎드려 절한 뒤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정성껏 약을 달여 어머니께 바쳤으나, 사흘이 지나도 어머니의 눈은 밝아지기는커녕 진물만 더 흘렀지요. 은실은 찢어지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약방으로 다시 달려갔습니다. 약방 담장 밑에 이르렀을 때, 담 너머로 송낙원과 침모의 은밀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영감마님, 그 백정 딸년에게 진짜 약을 주신 겁니까?"
"미쳤다고 그 비싼 영약을 천한 것에게 주겠느냐? 메줏가루에 숯가루를 개어 환약이랍시고 던져주었지. 게다가 그 은비녀는 순은인 데다 세공이 기가 막혀 한양에 팔면 은자 백 냥은 족히 받을 물건이더구나! 으하하!"
모든 것이 사기였습니다. 노모의 눈먼 약값을 가로채고 가짜 약을 준 것이었지요. 은실이 분통을 터뜨리며 마당으로 뛰어들려던 찰나, 약방 문이 벌컥 열리며 포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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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또의 행차와 드러난 은비녀
"암행어사 출도야!"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푸른 도포를 입은 젊은 암행어사가 성큼 들어섰습니다. 송낙원은 혼비백산하여 방바닥에 엎드렸고, 약방 마당에 서 있던 은실도 넋을 잃고 꿇어앉았습니다. 암행어사는 다름 아닌 은실과 백년가약을 맺었던 윤서 도령이었습니다. 윤서는 과거에 급제하여 남원 고을의 탐관오리와 악덕 상인들을 비밀리에 감찰하러 내려온 길이었지요.
"송낙원은 고개를 들라! 네놈이 가난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고 가짜 약을 팔아 치부했다는 고변을 듣고 내 직접 확인하러 왔다."
윤서의 눈동자가 송낙원의 책상머리에 놓인 물건에 닿았습니다. 낯익은 옥색 비단보와 그 위에 놓인 모란꽃 은비녀였습니다. 윤서는 떨리는 손으로 은비녀를 집어 들었습니다. 비녀 머리에 새겨진 '덕' 자를 본 순간, 윤서의 눈이 거칠게 흔들렸습니다.
"송낙원, 네놈이 이 은비녀를 대체 어디서 얻었느냐? 똑바로 고하지 못할까!"
"그, 그것은… 저기 꿇어앉은 백정의 딸 은실이가… 약값으로 제 발로 바친 것이옵니다!"
송낙원이 바들바들 떨며 은실을 가리켰습니다. 윤서는 비녀를 쥐고 천천히 걸어 나와 흙바닥에 엎드린 은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눈물로 맺은 화촉
"은실아, 이것이 정녕 네 혼수 비녀가 아니더냐? 왜 이 귀한 것을 이런 자의 손에 넘겼단 말이냐?"
윤서의 떨리는 목소리에 은실은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어머니의 눈을 뜨게 할 수만 있다면 제 혼수 따위는 재가 되어도 좋았습니다. 한데 저자가… 가짜 약으로 제 어미의 목숨을 농락했습니다!"
은실의 통곡에 윤서의 눈가에도 뜨거운 눈물이 고였습니다. 윤서는 즉시 송낙원을 하옥시키고 그의 전 재산을 몰수하라 명했습니다. 그리고 송낙원의 곳간 깊숙한 곳에서 찾아낸 진짜 중원 영약과 한양에서 동행한 어의(御醫)를 즉시 은실의 초가삼간으로 보냈습니다.
어의의 극진한 치료와 영약 덕분에 사흘 만에 노모는 기적처럼 눈을 떴습니다. 노모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본 것은 눈물범벅이 된 딸의 얼굴과, 그 머리에 꽂힌 눈부신 모란꽃 은비녀였지요.
며칠 뒤, 남원 고을에는 백정의 딸과 어사또의 혼례라는 전무후무한 경사가 열렸습니다. 윤서는 은실의 머리에 직접 은비녀를 꽂아 주며 만백성 앞에서 평생의 반려로 맞이했더랍니다.
맺으며
어미를 향한 처녀의 지극한 효심과 신의를 지킨 젊은 어사또의 사랑은 오래도록 남원 고을의 따뜻한 봄바람처럼 전해졌지요. 하늘도 감동할 지극한 정성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도 부모를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내어놓았던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다음 이야기 예고: 한밤중 흉가에서 들려오는 베틀 소리의 비밀이 밝혀집니다.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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