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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쿵, 쿵!
인정(人定)을 알리는 스물여덟 번의 종소리가 운종가 하늘에 묵직하게 가라앉자, 도성 안의 모든 문이 굳게 닫히고 숨소리마저 멎었더랍니다. 조선 땅에서 밤눈을 함부로 굴리다 순라군에게 걸리면 경수소에 갇혀 날이 밝도록 볼기짝이 터져 나가는 시절이었지요. 그런데 이 서슬 퍼런 야삼경에 숨을 헐떡이며 북촌 골목길을 뜀박질하는 사내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혜민서 앞 골목에서 약재를 팔던 서칠복이었습니다.
금지된 밤길을 달리는 사내

칠복은 가난하지만 속정이 깊고 사람 목숨을 제 목숨처럼 아끼는 순박한 약장수였지요. 그가 바라는 것이라곤 오직 하나, 피를 토하며 누운 홀어머니의 숨을 살리는 명약 ‘자하거’를 구하는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약재를 쥐고 흔들던 악질 포도부장 배만호가 문제였더랍니다. 배만호는 탐욕이 극에 달해 관아의 약재를 빼돌려 암거래를 일삼던 자였지요. 배만호는 칠복에게 낮 동안 거짓 구실을 대며 시간을 끌더니, 밤이 깊어서야 은밀히 말했습니다.
"어머니 살릴 약을 정 구하고 싶거든, 통행금지 방울이 울린 뒤 삼청동 내 비밀 창고로 혼자 오너라. 은전 닷 냥을 챙겨서 말이다."
야간 통행금지를 어기다 걸리면 경범죄라 해도 태형 십 도, 밤이 깊을수록 곤장 수가 스물, 서른 대로 늘어나는 법이었지요. 그러나 칠복에게는 당장 숨이 넘어가는 어머니가 먼저였기에 품속에 은전과 약초 봇짐을 안고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내달렸던 것입니다.
경수소의 피 묻은 곤장

골목 모퉁이를 돌아서는 찰나, 횃불 서너 개가 번쩍이며 장대 같은 사내들이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게 섰거라! 인정이 지난 지가 언젠데 어물거리느냐! 범야(犯夜) 죄인이다!"
순라군들의 우두머리로 나선 자는 다름 아닌 배만호였습니다. 배만호는 비열한 미소를 흘리며 칠복의 멱살을 틀어쥐었지요.
"이놈, 밤눈을 밝히며 도성을 쏘다니는 걸 보니 도둑놈이 분명하구나! 당장 결박해 경수소로 끌고 가라!"
"나으리, 낮에 나으리께서 약을 주시겠다 하여 오라지 않으셨습니까! 제 품의 은전을 가져가시고 제발 약을 주십시오!"
칠복이 울부짖었으나, 배만호는 들은 체도 않고 칠복의 품에서 은전 주머니를 낚아채 제 소매에 쑤셔 넣었습니다. 그러고는 칠복이 들고 있던 봇짐마저 바닥에 내동댕이쳤지요.
"네놈이 야금을 어기고도 관원을 능멸하는구나! 이놈의 볼기를 당장 서른 대 쳐서 옥에 가두어라!"
사정없이 형틀에 묶인 칠복의 볼기 위로 모진 곤장이 내리꽂히기 시작했습니다. 딱, 딱 하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피가 배어 나왔지요. 배만호는 칠복이 밤길을 다닌 죄를 뒤집어씌워 은전을 뺏고, 입을 막으려 장살(杖殺)까지 시킬 작정이었습니다.
바닥에 흩어진 붉은 흑요석
열 대, 스무 대를 넘어가자 칠복은 정신이 몽롱해졌더랍니다. 그때 칠복이 맞으며 몸부림치는 통에 그의 허리춤에 감춰둔 낡은 주머니 하나가 터졌습니다. 그 안에서 떼구르르 구른 것은 약재가 아니라, 붉은빛이 영롱하게 도는 밤톨만 한 돌멩이 하나였지요.
그 돌이 횃불 빛을 받아 붉은 광채를 뿜어내자, 곤장을 지켜보던 배만호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잠깐, 멈추어라! 저게 무엇이냐?"
배만호는 탐욕스럽게 다가가 그 돌을 낚아채더니 침을 꼴깍 삼켰습니다. 그것은 낮에 배만호가 궁궐에서 도난당했다며 칠복에게 누명을 씌우려 찾고 있던 바로 그 진귀한 어물(御物), ‘적혈옥’이었던 것입니다.
"네놈이 통행금지를 어긴 것뿐만 아니라 대궐의 보물까지 훔쳤구나! 네놈은 이제 능지처참을 면치 못할 것이다!"
배만호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소리치자, 피투성이가 된 칠복이 겨우 고개를 들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그것은… 훔친 것이 아닙니다. 나으리께서 낮에 제게 어머니 약값 대신 맡아두라며 억지로 쥐여주신 것 아닙니까!"
"닥쳐라! 천한 약장수 놈의 말을 누가 믿겠느냐? 이놈을 지하 토옥에 처넣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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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가르고 나타난 패도
바로 그 순간, 경수소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위엄 있는 목소리가 어둠을 갈랐습니다.
"야금을 어긴 죄인을 다스린다더니, 경수소에서 사리사욕을 채우는 간신배를 잡는 자리였구나!"
횃불을 앞세우고 들어선 이는 포도대장과 함께 곤룡포를 입지 않은 채 융복을 차려입은 젊은 종친이었습니다. 바로 낮부터 어물 도난 사건을 은밀히 추적하던 포도청의 상전들이었지요.
배만호는 사색이 되어 무릎을 꿇으며 변명했습니다.
"대장 나으리! 이놈이 통행금지를 어기고 도성을 쏘다니다 잡혔는데, 품에서 적혈옥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종친이 차갑게 웃으며 칠복의 찢어진 옷자락을 가리켰습니다.
"배만호, 네놈의 간계가 참으로 얕구나. 그 적혈옥 밑바닥을 보아라. 내가 표시해 둔 밀랍 도장이 찍혀 있지 않더냐? 칠복이 너를 고발하려고 일부러 관아로 향하던 길이었음을 어찌 숨기려 드느냐!"
사실 칠복은 낮에 배만호가 강제로 맡긴 돌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밤중에 배만호의 함정에 빠진 척하며 순라군 우두머리들이 모인 경수소 한복판으로 제 발로 뛰어든 것이었더랍니다. 칠복은 맞을 것을 각오하고, 밤길을 어긴 죄인이 되어 모든 순라군이 보는 앞에서 배만호의 죄증을 터뜨리려 했던 것이지요.
파직과 은전의 귀환
"억울하옵니다! 이놈이 저를 모함하는 것입니다!"
배만호가 길길이 뛰었으나, 칠복이 피 묻은 손으로 제 품속에서 구겨진 종이 한 장을 꺼내 바쳤습니다.
"나으리, 배만호가 제게 야삼경에 이 돌을 가지고 삼청동 창고로 오면 은전을 주고 어미의 약을 주겠다고 적어준 수결(서명)이 여기 있습니다!"
종이에는 배만호 특유의 삐뚤빼뚤한 낙관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지요. 빼도 박도 못할 증거 앞에 배만호는 털썩 주저앉았더랍니다.
포도대장의 호령이 떨어졌습니다.
"통행금지의 법을 지켜 백성을 보호해야 할 관원이, 법을 이용해 백성을 겁박하고 대궐의 물건을 빼돌렸으니 그 죄가 추호도 가볍지 않다! 배만호의 관직을 삭탈하고 곤장 백 대를 친 뒤 변방의 노비로 압송하라!"
비명과 함께 배만호의 볼기가 사정없이 으깨졌고,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통행금지를 어긴 칠복 역시 법에 따라 태형 열 대를 피할 수는 없었으나, 도적을 잡은 공이 인정되어 곤장 값으로 쌀 다섯 섬과 어머니를 살릴 귀한 자하거를 상으로 받게 되었지요.
맺으며
피투성이가 된 엉덩이를 부여잡고도 어머니의 약을 품에 안은 칠복의 얼굴에는 그제야 환한 달빛 같은 웃음이 번졌더랍니다. 엄격한 법이라 하여도 그 법을 악용해 백성을 옥죄려던 간악한 자는 결국 스스로 파놓은 어둠의 덫에 걸려 패망하고 말았으니, 참으로 통쾌한 하룻밤의 소동이었지요. 여러분도 혹시 억울하게 법의 덫에 걸렸다가 도리어 기지로 악인을 무너뜨린 통쾌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한밤중 외딴 무덤가에서 소복 입은 여인이 건넨 놋가락 한 쌍의 비밀.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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