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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도 숨어버린 그믐밤, 강원도 삼척 고을의 험준한 산수재 너머로 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이 그림자처럼 스러져 가고 있었더랍니다. 가파른 바윗길을 맨발에 짚신 한 짝으로 버티며 피를 흘리면서도, 여인의 품에는 작고 낡은 사기호롱 하나가 소중하게 안겨 있었지요.
마을 사람들은 밤마다 산수를 넘는 이 여인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습니다. 삼 년 전 남편을 잃고 눈까지 멀어버린 시어머니를 모시는 청상과부 은실이었는데, 밤마다 넋이 나간 듯 산을 오르내리니 여우에 홀렸다는 흉흉한 소문마저 돌았더랍니다.
피 묻은 버선발과 밤안개

때는 조선 숙종 임금 시절, 첩첩산중 삼척도호부 묵호포 인근의 산골 마을이었습니다. 은실은 가난한 화전민의 딸로 태어나 천성이 온유하고 효심이 깊었으나, 혼인한 지 반년 만에 남편이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돌아오지 못했지요. 그 충격으로 시어머니 조씨 부인은 피눈물을 쏟다가 양쪽 눈의 빛을 완전히 잃고 말았습니다.
은실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시어머니의 두 눈이 다시 밝아져 세상을 보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양에서 낙향했다는 용한 의원 배도현이 마을 어귀에 약방을 차리고 솔깃한 말을 흘렸더랍니다.
"산수재 너머 천년 바위 밑에서 자라는 옥설초(玉雪草)의 이슬을 매일 밤 자시에 받아 시어머니의 눈에 넣고, 그 뿌리를 달여 백 일 동안 마시게 하면 반드시 봉사의 눈이 뜨일 것이오."
배 의원의 말에 은실은 주저 없이 험한 산길에 올랐습니다. 밤마다 호랑이가 나온다는 험산이었지만, 시어머니를 향한 은실의 마음을 막을 수는 없었지요. 그러나 은실이 산을 넘을 때마다, 마을의 부유한 토호이자 약방의 실질적 주인인 최만호의 눈빛은 음험하게 번뜩이고 있었습니다.
산마루에 도사린 검은 욕심

최만호는 본래 남의 땅을 가로채고 고리대를 놓아 배를 불린 교활한 사내였더랍니다. 그는 일찍이 과부가 된 은실의 단아한 자태에 흑심을 품고 여러 번 은실의 집을 기웃거렸으나 번번이 거절당했지요.
"늙고 눈먼 어미를 봉양하느라 네 청춘이 다 썩는구나. 내 첩으로 들어오면 저 늙은것에게 매달 쌀 두 섬과 좋은 약을 대주마."
최만호의 은근한 희롱에 은실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천륜을 저버리고 편히 살 길을 찾느니, 시어머니를 모시다 굶어 죽는 편을 택하겠나이다."
독이 오른 최만호는 배 의원과 짜고 흉계를 꾸몄습니다. 효심 깊은 며느리를 깊은 산으로 유인해 겁탈하거나, 지쳐 쓰러지게 만들어 제 손아귀에 쥐려는 속셈이었지요.
게다가 은실의 집안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작은 가보가 하나 있었으니, 남편이 첫날밤 건네주었던 정교한 은비녀였습니다. 비녀 끝에는 죽은 시아버지가 남긴 작은 낙관이 새겨져 있었는데, 최만호는 그 은비녀마저 탐을 내어 은실의 숨통을 더욱 조여왔더랍니다.
"내일이면 백 일이 되는 날이다. 그 약초를 구하지 못하면 네 시어머니는 영영 장님이 될 터이니, 네 정성이 어디까지 가나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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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끝에서 드러난 비수

드디어 백 일째 되던 밤, 살을 에는 삭풍이 몰아치고 빗방울까지 흩날렸습니다. 은실은 상처투성이가 된 발을 이끌고 마침내 산수재 꼭대기 절벽 틈에서 피어난 마지막 옥설초를 캐내 품에 넣었지요.
"어머니, 이제 다 되었습니다. 내일이면 어머니께서 세상을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으슥한 바위 뒤에서 횃불이 켜지며 최만호와 그의 하수인들이 길을 막아섰더랍니다.
"이 깊은 밤에 계집 혼자 험한 산을 넘나들며 사내를 만난다는 소문이 자자하더니, 과연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지!"
최만호는 비열하게 웃으며 은실의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어찌 이리 억울한 누명을 씌우십니까! 저는 오직 시어머니의 눈을 띄울 약초를 캐러 왔을 뿐입니다!"
은실이 울부짖으며 품의 약초를 움켜쥐자, 최만호가 서슬 퍼런 칼을 빼 들었습니다.
"시어머니 핑계를 대며 밤마다 외간 남자를 만났다고 관아에 고발하면 너는 영락없이 멍석말이를 당할 터! 살고 싶거든 그 품에 든 은비녀를 내놓고 내 뜻을 따르겠다고 맹세해라!"
최만호의 손이 은실의 멱살을 잡으려던 찰나, 어둠 속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 더러운 손을 당장 치우지 못할까!"
맹인의 눈에 맺힌 피눈물

횃불 너머에서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 나온 이는 놀랍게도 눈먼 시어머니 조씨 부인이었더랍니다.
"어머니! 여긴 어찌 오셨습니까! 앞도 보이지 않으시면서 이 험한 산길을…"
은실이 사색이 되어 달려가려 하자, 조씨 부인의 뒤로 붉은 관복을 입은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삼척부사와 포졸들이었지요.
최만호는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사또! 이게 무슨 변입니까? 저는 그저 밤마다 행실이 부정한 과부를 잡으려…"
그때 시어머니 조씨 부인이 지팡이를 내던지며 앞으로 나섰습니다.
"네 이놈, 최만호! 네 놈이 배 의원과 짜고 내 며느리를 사지로 몰아넣은 죄를 내 모를 줄 알았더냐!"
조씨 부인은 품에서 피 묻은 천 조각 하나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것은 매일 밤 은실이 탕약을 달여 올릴 때마다 몰래 남겨두었던 약 찌꺼기였지요.
"배 의원이 내 눈을 고친답시고 준 약은 눈을 띄우는 약이 아니라, 사람의 장기를 서서히 망가뜨리는 독초 독말풀이었느니라! 내 며느리가 백 일 동안 정성으로 달여온 탕약의 냄새가 날이 갈수록 독해져, 낮에 몰래 한양에서 온 옛 어의를 찾아가 보였더니 천인공노할 독약이라 하더구나!"
은실은 망연자실하여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어머니… 그렇다면 그 약을 다 드셨단 말입니까?"
"아니다, 아가. 네가 산을 넘을 때마다 행여 다칠까 가슴이 찢어져 탕약을 마시는 척하며 모조리 땅에 쏟아버렸단다. 그리고 네 버선에 묻은 피를 만지며 매일 밤 통곡을 했다!"
조씨 부인은 삼척부사를 향해 은실의 머리에 꽂힌 은비녀를 가리켰습니다.
"사또, 저 비녀를 보십시오! 삼 년 전 풍랑에 휩쓸려 죽었다던 제 아들이 한양으로 압송되는 최만호의 조세 횡령 장부를 목숨 걸고 지켜내어, 관가에 넘기고 순절하며 남긴 유품입니다! 저 간악한 자는 제 아들의 원수이자, 그 비밀 장부를 숨겨둔 비녀를 빼앗으려 며느리를 능욕하려 한 것입니다!"
은실이 떨리는 손으로 은비녀의 잠금새를 비틀자, 그 속에서 얇게 접힌 비단 장부가 스르륵 빠져나왔더랍니다. 최만호가 백성들의 곡식을 빼돌리고 남편을 물에 빠뜨려 죽게 만든 모든 밀약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지요.
"네놈이 내 아들을 바다에 밀어 넣고, 이제는 며느리의 효심까지 이용해 장부를 없애려 하였느냐!"
조씨 부인의 서슬 퍼런 일갈에 최만호는 사시나무 떨듯 떨며 무릎을 꿇고 말았더랍니다.
맺으며
간악한 탐관오리 최만호와 거짓 의원 배도현은 대역죄로 다스려져 절도에 위리안치되었고, 그들의 전 재산은 몰수되어 고통받던 백성들에게 고루 돌아갔습니다. 지극한 효성으로 시어머니를 지켜내고 억울하게 죽은 남편의 원혼을 달랜 며느리 은실에게는 조정에서 정려문이 내려졌으며, 조씨 부인은 비록 눈은 뜨지 못했으나 효부의 극진한 봉양 속에 평안한 여생을 누렸더랍니다.
세상에 캄캄한 어둠이 짙게 깔릴지라도, 참된 정성과 맑은 넋은 한 줄기 빛이 되어 기필코 진실을 밝혀내는 법이지요. 여러분의 고을에도 이처럼 밤길을 홀로 걸으며 슬픔과 어둠을 이겨낸 어진 이들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까?
다음 이야기 예고: 한밤중 홀로 남은 서당 훈장의 방 안으로 날아든 핏빛 족자의 기이한 비밀이 밝혀집니다.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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