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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임금 시절, 한양 남산 밑자락 필동 골목에 붉은 피 같은 감이 주렁주렁 열리던 가을날의 일이었지요.
"네 이놈! 남의 집 담을 넘어온 감을 따 먹으려 들다니, 손목을 분질러 놓아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천둥 같은 호통 소리와 함께 어린아이의 뺨을 후려치는 소리가 담 너머로 찰지게 울려 퍼졌더랍니다.
담장을 넘어간 붉은 열매

호통을 친 이는 장차 도원수가 될 권율 대감 댁의 집사, 마달석이라는 자였지요.
마달석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욕심쟁이로, 권 대감의 위세를 등에 업고 동네 사람들을 쥐락펴락하던 위인이었답니다.
마달석의 발길질에 채여 흙바닥을 구른 아이는 이웃에 살던 양반가의 어린 도령, 훗날 오성대감으로 이름을 떨치게 될 아홉 살 배기 이항복이었습니다.
항복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기개가 남다르고 글재주와 담력이 빼어난 비범한 아이였지요.
항복의 집 마당에는 해마다 달고 굵은 감이 열리는 큰 감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그 가지 하나가 하필 권 대감 댁 담장을 훌쩍 넘어 뻗어 있었던 것입니다.
봄부터 정성스레 거름을 주고 벌레를 잡아 온 항복은 감이 익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지요.
하지만 마달석은 가지가 제 쪽 담으로 넘어왔으니 감 또한 제 것이라며 아이의 손을 무자비하게 쳐냈던 것입니다.
욕심쟁이 마 집사의 횡포

"어허, 네놈 집에서 자란 나무라도 우리 집 하늘과 마당에 걸쳐 있으니 감은 응당 우리 대감 댁의 것이니라!"
마달석은 기름진 턱을 치켜들며 장대 끝으로 잘 익은 감을 마구 털어 바구니에 담았지요.
항복이 흙을 털고 일어나 눈을 부릅뜨고 따져 물었습니다.
"뿌리가 우리 집 마당에 박혀 있고, 내 손으로 물을 주어 키운 감이온데 어찌 그쪽 것이란 말입니까?"
"어린놈이 어디서 말대답이냐! 담벼락 안으로 들어온 것은 참새 한 마리도 내 것이거늘, 썩 물러가지 못할까!"
마달석은 항복을 거칠게 밀치더니 대문을 쾅 닫아걸어 버렸답니다.
분통이 터진 항복은 눈물을 삼키며 제 집 마당으로 돌아와 우두커니 감나무를 올려다보았지요.
그때 항복의 눈에 문득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담벼락 틈새로 비어져 나온 낡은 서찰 한 조각과 마달석이 흘리고 간 은비녀 하나였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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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살을 뚫고 들어간 주먹
이튿날 아침, 항복은 말끔하게 도포를 차려입고 권율 대감의 사랑채 앞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갔지요.
권율 대감은 당시 조정의 중신이자 엄하기로 소문난 무관이었기에 집안 하인들도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는 곳이었습니다.
마달석이 항복을 발견하고 몽둥이를 치켜들며 쫓아내려던 찰나였습니다.
"물러서라! 나는 오늘 권율 대감께 물을 것이 있어 왔다!"
항복은 쩌렁쩌렁 소리를 치더니 마달석을 제치고 단숨에 대감의 사랑채 댓돌 위로 뛰어올랐더랍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작은 주먹을 쥐어 방안으로 불쑥 찔러 넣었지요.
북풍한설도 뚫지 못할 두꺼운 한지 문창살이 '쫘악' 소리를 내며 찢어지고, 작지만 단단한 주먹이 사랑방 한가운데로 쑥 들어갔습니다.
방 안에서 병서를 읽고 있던 권 대감은 대경실색하여 눈을 부릅떴지요.
"어떤 발칙한 놈이 감히 무관의 사랑방 문창살을 부수고 주먹을 들이미느냐!"
담장 안의 손과 붉은 꼬리
방 밖에서 앳되지만 당찬 항복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더랍니다.
"대감마님, 방 안으로 불쑥 들어간 이 팔과 주먹은 대체 누구의 팔입니까?"
권 대감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으나 아이의 당돌한 행동에 호기심이 동해 버럭 소리를 질렀지요.
"네놈의 몸뚱이에 붙어 있는 팔이니 당연히 네놈의 팔이지, 어찌 그런 멍청한 소리를 묻느냐!"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항복이 문밖에서 껄껄 웃으며 쐐기를 박았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우리 집 마당에 뿌리를 둔 감나무 가지가 담장을 넘었다고 해서, 권 대감 댁 집사는 그 감이 모조리 대감 댁의 것이라 우기며 저를 때리고 감을 빼앗아 간단 말입니까?"
권 대감은 무릎을 탁 치며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지요.
아홉 살 어린아이의 기막힌 비유와 담력에 감탄한 대감이 빙그레 웃으며 문을 열어젖혔습니다.
"허허, 네놈이 이웃집 사는 백사로구나. 네 말이 지당하다. 문창살 값은 묻지 않을 터이니 들어오너라."
하지만 항복은 들어가지 않고 품속에서 어제 주운 은비녀와 반쯤 찢긴 서찰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지요.
"대감마님, 감나무도 억울하지만 이 비녀와 서찰의 주인도 억울할 듯하여 함께 가져왔습니다."
그 비녀는 며칠 전 권 대감의 안채에서 사라져 큰 소동이 났던 정부인의 패물이었고, 서찰은 마달석이 한양 장터의 장물아비에게 비녀를 넘기려던 밀서였더랍니다.
마달석은 감을 털던 담벼락 구석 땅속에 훔친 장물을 숨겨 두었다가 덜미가 잡힌 것이었지요.
얼굴이 흙빛이 된 마달석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답니다.
맺으며
진실을 알게 된 권 대감은 마달석의 볼기를 쳐서 관아로 넘겼고, 어린 항복의 기개와 지혜에 깊이 반해 그를 훗날의 사위로 삼기로 마음먹었더랍니다.
붉게 익은 감 한 바구니는 덤으로 항복의 품에 가득 안겨 돌아왔지요.
욕심이 지나치면 눈앞의 이치마저 가려 스스로 무덤을 파는 법임을, 그 옛날 남산골의 감나무는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여러분도 혹시 억지 논리로 남의 것을 탐하다가 더 큰 것을 잃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깊은 밤, 묘포를 파헤치던 정체불명의 선비가 쥐고 있던 놋가락의 정체는?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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