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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대왕 시절, 충청도 온양으로 통하는 길목은 가을걷이가 한창인 계절이었으나 어쩐지 서늘한 기운만 감돌았습니다. 벼 이삭이 누렇게 익은 논두렁 위로 웬 늙은이 하나가 칡베 옷을 걸치고 누렁소의 등에 비스듬히 얹혀 흔들흔들 나아가고 있었지요.
그 노인의 허리춤에는 다 낡은 대금 하나와 흙먼지가 묻은 풀피리가 매달려 있었는데, 맑은 하늘에 울리는 소 울음소리가 어찌나 구성진지 지나가던 새들도 날개를 접고 쳐다볼 지경이었더랍니다.
누렁소를 탄 늙은이

그 늙은 길손의 정체는 바로 우의정 벼슬을 지내던 맹사성 대감이었습니다. 성품이 소탈하여 으리으리한 가마나 말 타기를 싫어하고, 고향 온양으로 향할 때면 늘 이 오래된 누렁소 한 마리에 몸을 실었지요. 맹 대감의 바람은 그저 조정의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고 조상의 선영을 돌보며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눈으로 직접 살피는 것뿐이었습니다.
"어허, 누렁아. 걸음이 너무 빠르면 백성들 밭고랑 파헤쳐진 것이 안 보이고, 너무 느리면 해 떨어져 주막도 못 찾겠구나. 그저 딱 네 걸음대로만 가자꾸나."
맹 대감은 풀피리를 입에 물고 흥얼거리며 온양 읍내 어귀에 다다랐습니다. 그런데 마을 입구 주막거리에서 별안간 험악한 고함과 함께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습니다.
빼앗긴 전답과 피눈물

주막 평상 앞에서는 온양 현감의 사촌 아우이자 이 고을의 악명 높은 토호인 배만식이 가솔들을 거느리고 서 있었습니다. 배만식의 탐욕은 끝이 없어, 현감의 권세를 등에 업고 백성들의 기름진 땅을 헐값에 강탈해 온 자였지요.
"네 이놈! 네 아비가 진 빚이 쌀 백 섬인데 어찌 전답 문서를 내놓지 않겠다는 것이냐!"
"나으리, 당치도 않습니다! 저희 아버님께서는 석 달 전 이백 냥을 다 갚으시고 현감 나으리의 직인이 찍힌 영수증까지 받아 두셨습니다요!"
주막집 아들 바우가 멍석 바닥에 엎드려 울부짖었으나, 배만식의 하인들은 바우의 모친을 거칠게 밀쳐내며 방 안의 세간을 모조리 엎어 버렸습니다. 배만식은 품에서 누런 종이 한 장을 꺼내 흔들며 비열하게 웃었지요.
"이게 바로 네놈들이 쓴 차용증이다! 어디 증거도 없는 헛소리를 지껄이느냐? 오늘 당장 이 주막과 뒷동산 밭뙈기를 넘기지 않으면 옥에 가두어 볼기를 칠 것이다!"
주막 한구석의 피리 소리
소 등에서 내린 맹 대감은 허름한 패랭이를 푹 눌러쓴 채 주막 평상 구석에 조용히 걸터앉았습니다. 배만식은 흙투성이 노인이 눈앞에 어슬렁거리자 눈을 부라리며 침을 뱉었습니다.
"웬 거지 같은 늙은이가 눈치도 없이 남의 일에 끼어들어? 소새끼나 끌고 썩 꺼지지 못할까!"
맹 대감은 화를 내기는커녕 껄껄 웃으며 허리춤의 대금을 만지작거렸습니다.
"여보시오, 행인도 목이 마르면 물 한 사발은 얻어 마실 수 있는 법인데 인심이 흉흉하구려. 헌데 그 손에 든 차용증이라는 종이, 묵향이 채 마르지도 않은 듯한데 어찌 석 달 전의 것이라 하시오?"
배만식의 얼굴이 순간 붉으락푸르락해졌습니다. 실은 빚을 다 갚았다는 영수증을 현감 관아의 문서고에서 몰래 빼돌려 불태우고, 며칠 전 새로 위조한 가짜 차용증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디서 굴러먹던 촌구석 늙은이가 주둥이를 놀리느냐! 여봐라, 이 늙은이와 저 누렁소를 당장 도살장에 처넣어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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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렁소 방울에 숨겨둔 증서
하인들이 몽둥이를 치켜들고 달려들자, 맹 대감은 품에서 낡은 죽간(竹竿)을 꺼내 그들의 손목을 찰싹 내리쳤습니다. 뼈마디를 때리는 매서운 손놀림에 장정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지요. 당황한 배만식이 칼을 뽑아 들려 하자, 맹 대감은 곁에 얌전히 서 있던 누렁소의 목덜미를 툭툭 쳤습니다.
"누렁아, 온양 현감의 관아를 지나올 때 네 방울 속에 던져 넣어진 그 종이를 좀 꺼내 주려무나."
누렁소는 꼬리를 한번 치더니 목에 달린 커다란 놋방울을 짤랑 흔들었습니다. 맹 대감이 방울 안쪽의 비밀 틈새에서 비단 보자기에 싸인 두툼한 두루마리 하나를 쑥 뽑아 올렸습니다.
"이, 이것이 무엇이냐?"
"네 놈의 사촌 형인 온양 현감이 한양의 판서들에게 뇌물로 바치려고 모아 둔 비밀 장부다. 내가 관아 앞을 지나는데, 네 놈들의 패악을 견디다 못한 관아의 어린 사령 하나가 이 소의 방울 속에 목숨을 걸고 밀어 넣더구나. 네 놈이 불태웠다던 바우네 영수 원부(原簿)도 여기에 고스란히 묶여 있더군."
소 등 위의 암행 정승
배만식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습니다. 그는 도리어 악을 쓰며 칼을 휘두르려 들었습니다.
"이 늙은 도둑놈이 관아의 기밀을 훔쳤구나! 네놈을 여기서 베어 버리면 그만이다!"
바로 그 순간, 맹 대감이 허름한 칡베 장삼을 젖히며 품속에서 번쩍이는 패 하나를 꺼내 들었습니다. 붉은 술이 달린 옥관자와 함께 어전에서만 쓰이는 정승의 백옥패가 가을 햇살 아래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내가 바로 우의정 맹사성이다! 네놈은 한 나라의 법도를 짓밟고 백성의 피를 빨았으니, 어찌 목숨을 부지하길 바라느냐!"
'맹사성'이라는 세 글자가 떨어지자마자 주막거리는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습니다. 배만식은 들고 있던 칼을 떨어뜨리고 다리가 풀려 흙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찧었습니다.
"저, 정승 대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소인이 눈이 멀어 정승 대감인 줄도 모르고……!"
맹 대감의 호령에 뒤따라오던 암행 포졸들이 들이닥쳤고, 배만식은 물론 관아에서 떨고 있던 온양 현감까지 모조리 포박되어 한양 의금부로 압송되었습니다. 억울하게 땅을 빼앗길 뻔했던 바우와 모친은 눈물을 흘리며 맹 대감의 소 발치에 엎드려 절을 올렸더랍니다.
맺으며
맹 대감은 바우의 등을 두드려 준 뒤,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누렁소 등에 몸을 싣고 풀피리를 불며 유유히 고향 집으로 향했습니다. 소는 말이 없어 세상의 온갖 비밀을 품고도 묵묵히 걷기만 하니, 높은 벼슬아치라도 그 소걸음에서 백성을 살피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었지요.
혹 여러분도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업신여기다 큰코다친 기막힌 옛이야기를 알고 계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한밤중 흉가에서 들려온 베틀 소리의 정체와 은비녀를 품은 해골의 비밀이 펼쳐집니다.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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