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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조차 숨어버린 그믐밤, 동해 묵호 나루터 물결 위로 허연 물거품이 일더니 곡소리가 잦아들었습니다. 바닷바람에 섞여 드는 그 소리는 갓난아이 울음 같기도 하고, 물에 빠져 숨이 끊어진 여인의 흐느낌 같기도 하여 뱃사람들은 해만 지면 나루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했지요.
조선 숙종 12년 가을, 강원도 삼척포에 새로 부임한 현감 윤석주(尹錫柱)는 성품이 대쪽 같고 백성의 억울함을 제 일처럼 아파하는 선비였습니다. 허나 이 묵호 나루터의 괴변 앞에서는 그 강직한 사또 역시 붓을 쥐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었더랍니다.
나루터의 곡소리와 늙은 사공의 호소

"사또나리, 제발 억울하게 죽은 넋이라도 달래 주십시오. 나루터에 시신 한 구 건져내지 못한 원귀가 붙어 뱃길이 막혔습니다요."
백발이 성성한 나루터 사공 최 노인이 관아 뜰에 엎드려 눈물로 읍소했습니다. 지난여름, 소금 장수 조달구(趙達九)의 짐배에 올랐던 한 처녀가 파도에 휩쓸려 사라진 뒤로, 밤마다 나루터 물가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조달구는 삼척 일대에서 소금과 미역을 독점하며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던 간교한 상단 행수였습니다. 윤 현감이 그를 불러 정황을 묻자, 조달구는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능글맞게 웃었지요.
"허허, 나으리. 그 아이는 뱃삯 낼 돈도 없어 태워주었더니만, 뱃멀미를 이기지 못하고 밤중에 바다로 고꾸라졌습니다요. 시신이야 거친 파도에 진작 물고기 밥이 되었을 터인데, 귀신이라니 가당키나 합니까?"
조달구는 말을 마치며 슬그머니 비단 주머니 하나를 사또의 책상 귀퉁이로 밀어 넣었습니다. 은전 서른 냥이 묵직하게 들어 있는 뇌물 주머니였지요. 윤 현감은 불호령을 내리며 그를 내쫓았으나, 증좌가 없어 당장 벌할 수는 없었더랍니다.
물가에 차려낸 기이한 제사상

윤 현감은 그날 밤, 군졸들을 물리고 홀로 묵호 나루터 바위 끝으로 나아갔습니다. 한 손에는 맑은 청주 한 병, 다른 손에는 갓 쪄낸 흰 떡과 명태포 한 마리를 들고서 말이지요.
"원혼이여, 억울한 사연이 있다면 내 어찌 외면하겠는가. 마시고 털어놓거라."
윤 현감은 술을 바다에 붓고 큰절을 세 번 올렸습니다. 귀신을 잡으려 굿판을 벌이거나 무당을 부르는 대신, 목숨을 잃은 가련한 백성에게 지방관으로서 머리를 숙인 것이었지요. 차가운 바닷바람이 사또의 도포 자락을 세차게 때리더니, 잔잔하던 바다 한가운데서 푸르스름한 물안개가 피어올랐습니다.
돌아와 관아 침소에 든 사또는 깊은 밤 기이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꿈속에 나타난 여인은 머리카락에서 짠 바닷물을 뚝뚝 흘리며 젖은 댕기를 매만지고 있었더랍니다.
"사또님, 사또님. 저는 바다에 빠져 죽은 것이 아니옵니다. 숨을 쉬지 못하는 것은 물 때문이 아니라, 묵호 뒤뜰 흙구덩이 속 붉은 돌 밑이옵니다."
여인은 피눈물을 흘리며 품에서 축축하게 젖은 자줏빛 비단 댕기 반쪽을 꺼내 사또의 베갯머리에 놓더니, 닭 울음소리와 함께 물거품처럼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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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매 속에서 나온 피 묻은 댕기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 윤 현감은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베갯머리를 더듬던 사또의 손끝에 차갑고 축축한 촉감이 닿았으니, 꿈속 여인이 건넸던 바로 그 자줏빛 댕기 반쪽이 바닷물에 젖은 채 그대로 놓여 있던 것이지요.
윤 현감은 날이 밝자마자 포졸들을 거느리고 조달구의 집으로 들이닥쳤습니다. 조달구는 아침상을 받다 말고 사또의 행차에 당황하여 뛰쳐나왔습니다.
"사또나리, 이 꼭두새벽에 포졸들까지 대동하고 무슨 변고이옵니까?"
"달구야, 네 집에 붉은 돌이 깔린 뒤뜰 흙구덩이가 어디 있느냐?"
사또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 조달구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포졸들이 뒤뜰 장독대 뒤편을 파헤치자, 붉은빛이 도는 널찍한 암석 아래에서 썩어가는 가마니에 싸인 젊은 여인의 시신이 드러났더랍니다.
목에는 누군가의 손에 졸린 멍 자국이 선명했고, 물에 불은 흔적 따위는 전혀 없는, 땅속에서 썩어간 주검이었습니다. 묵호 나루터에서 빠져 죽었다던 그 처녀의 시신이었지요.
드러난 악행과 갈라진 비단
"이 계집은 제 손으로 배에서 떨어졌다 하지 않았느냐! 어찌 바다가 아닌 네 집 뒤뜰에 묻혀 있단 말이냐!"
윤 현감이 호통을 치자, 조달구는 무릎을 꿇으면서도 혀를 굴리며 발뺌을 하였습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소인은 모릅니다! 시신이 떠밀려왔기에 두려워 묻었을 뿐, 소인이 죽인 것이 아닙니다요!"
그때 윤 현감이 품속에서 꿈결에 받은 자줏빛 비단 댕기 반쪽을 꺼내 들었습니다.
"네 옷소매를 털어보거라. 네 놈의 소매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내 이미 다 알고 왔다."
포졸들이 조달구의 소매를 낚아채 뒤집자, 그 안에서 찢겨 나간 나머지 자줏빛 댕기 반쪽이 툭 떨어졌더랍니다. 조달구는 처녀를 겁탈하려다 반항하자 목을 졸라 살해했고, 처녀가 쥐고 있던 댕기를 뜯어내 제 소매에 감춘 뒤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던 것이지요.
두 개의 댕기 조각을 맞대어 보니 잘린 올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나루터의 물귀신 소리는 처녀의 넋이 조달구의 악행을 고하고자 바다를 울려 사또를 불러낸 것이었더랍니다. 조달구는 더 이상 변명하지 못하고 땅바닥에 엎드려 사시나무 떨듯 떨었습니다.
맺으며
조달구는 대역죄로 다스려져 한양으로 압송된 뒤 저잣거리에서 효수되었고, 억울하게 숨진 처녀의 넋은 사또가 마련해 준 양지바른 언덕에 묻혀 비로소 편안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 뒤로 묵호 나루터에는 밤마다 들리던 기이한 곡소리가 거짓말처럼 뚝 끊겼고, 달빛만이 고요한 물결을 비추었더랍니다.
세상에 억울하게 묻힌 진실이란 결코 파도에 쓸려가지도, 흙탕물에 지워지지도 않는 법인가 봅니다. 혹 여러분도 한밤중 물가에서 들려오는 원혼의 울음소리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대낮에 제삿밥을 훔쳐 먹고 관아로 제 발로 걸어 들어온 호랑이의 사연이 펼쳐집니다.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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