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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이 사납게 문풍지를 때리던 늦은 밤, 적막하던 산골 서당의 사립문이 덜컹거렸습니다. 글 읽기를 멈춘 훈장의 귓가에 흙탕물을 밟는 가벼운 발소리가 스쳐 지나갔지요.
끼이익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더니, 삿갓을 푹 눌러쓴 기이한 서생 하나가 방 안으로 불쑥 들어섰습니다. 기름등잔 불빛 아래 드러난 서생의 턱 밑에는 새하얀 털이 보송보송 돋아나 있었더랍니다.
비바람 뚫고 찾아온 괴이한 손님

숙종 임금 시절, 충청도 제천의 깊은 산골 골짜기에는 허 봉사라 불리는 훈장 허진목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벼슬길은 막혔으나 학문이 깊고 심성이 곧아 인근 마을에서 존경을 받던 선비였지요.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는 돈 한 푼 받지 않고 천자문을 가르치는 그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세상에 도리가 바로 서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날 밤 서당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삿갓 그늘 아래로 번뜩이는 금빛 눈동자와 도포 자락 밑으로 슬그머니 삐져나온 붉은 꼬리는 영락없는 불여우의 형상이었지요. 허 훈장은 깜짝 놀라 벼루를 엎지를 뻔했으나,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점잖게 물었습니다.
"네 짐승의 탈을 쓰고 어찌 인가의 글방을 함부로 범하느냐?"
괴이한 서생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읍을 하더니 나직하고 맑은 목소리로 답했습니다.
"소생은 뒷산 바위굴에 사는 여우 백선이라 하옵니다. 사람이 되고자 백일 기도를 올리는 중이나, 사람의 도리를 알지 못하면 허깨비에 불과함을 깨달았습니다. 부디 어진 훈장님께서 소생에게 글과 의(義)를 가르쳐 주십시오."
괴물이 나타나 목숨을 위협할 줄 알았더니 글을 청하는 꼴이 기특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허 훈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방 한구석을 가리켰습니다.
"배우고자 하는 마음에 사람과 짐승의 구별이 어디 있겠느냐. 거기 앉거라. 오늘 밤은 맹자부터 읽어 보자꾸나."
기름 묻은 엽전과 사또의 흉계

그날 이후 백선은 밤마다 삼경(밤 11시~새벽 1시)만 되면 서당을 찾아와 공손히 무릎을 꿇고 글을 배웠습니다. 여우 서생은 총명하기 이를 데 없어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쳤고, 새벽닭이 울기 전에 반드시 절을 올리고 산으로 돌아갔지요. 떠날 때마다 백선은 책값이라며 낡은 엽전 석 냥씩을 조용히 방바닥에 내려놓고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그 엽전들에는 늘 돼지 기름 냄새와 더불어 불에 그을린 듯한 거무스름한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허 훈장은 의아했으나 그저 산속 무덤가에서 주워 온 노잣돈이려니 여기고 벽장 속 옹기 항아리에 고이 모아 두었지요.
그 무렵, 제천 고을에는 새로 부임한 현감 배극렴의 가렴주구가 극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배 현감은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 한양 정승 판서들에게 뇌물을 바치는 탐관오리로 악명이 자자했지요. 배 현감은 허 훈장이 백성들의 존경을 받으며 자신을 비판하는 상소를 준비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겨 없앨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허 훈장이 《논어》의 한 구절을 강론하며 말했습니다.
"군자는 의로움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 하였다. 너는 짐승이나 의를 좇으니 참된 선비요, 백성을 쥐어짜는 현감은 사람이되 금수만도 못하구나."
백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훈장을 바라보았습니다.
"훈장님, 세상에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도 짐승의 피를 마시는 자가 참으로 많사옵니다."
관아의 포졸들이 들이닥치다
달빛이 유난히 밝던 보름날 밤, 백선이 서당에 오지 않았습니다. 대신 새벽안개를 가르고 관아의 포졸 스무 남짓이 서당 마당으로 들이닥쳤지요. 몽둥이를 든 포교가 방문을 박차고 들어와 허 훈장의 멱살을 잡았습니다.
"허진목! 네놈이 산채의 화적패와 내통하여 관아의 세곡을 빼돌렸다는 밀고가 들어왔다! 당장 끌고 가라!"
허 훈장은 영문도 모른 채 관아 뜰로 끌려가 차가운 바닥에 꿇어앉혀졌습니다. 동헌 마루 위에는 탐욕스러운 눈빛의 배 현감이 냉소를 머금고 앉아 있었지요.
"허진목, 네놈이 선비의 탈을 쓰고 관아 창고의 군량미와 은전을 훔쳐 화적질을 일삼았다지? 증좌가 명백하거늘 어찌 발뺌하려느냐!"
"사또! 이는 가당치 않은 모함입니다! 평생 글만 읽은 늙은이가 어찌 도적질을 한단 말입니까!"
배 현감은 비열하게 웃으며 형방에게 눈짓을 했습니다.
"네놈의 방 벽장 항아리에서 나온 이 엽전들이 바로 지난달 털린 관아 창고의 화재 속에서 건져낸 세곡전이다! 불에 그슬리고 방화 기름이 묻은 관전(官錢)이 네놈 집에서 나왔는데도 부인할 테냐!"
허 훈장은 머리를 얻어맞은 듯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백선이 밤마다 건네준 그 엽전들이 관아의 도난당한 장물이었던 것입니다.
'그 여우 놈이 나를 사지에 몰아넣으려고 흉계를 꾸민 것이었단 말인가!'
허 훈장이 피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하자, 배 현감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호통쳤습니다.
"저 간악한 놈을 당장 주리를 틀고 옥에 가두어라! 내일 날이 밝는 대로 효수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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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헌 마루를 울린 반전의 호패
모진 고문으로 허 훈장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려던 찰나, 동헌 지붕 위에서 서늘한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돌풍이 일며 관아의 횃불들이 일제히 꺼졌고, 짙은 안개 속에서 하얀 도포를 입은 서생 백선이 사뿐히 내려앉았지요.
포졸들이 놀라 칼을 뽑았지만 백선의 날카로운 눈빛에 얼어붙어 한 걸음도 떼지 못했습니다. 배 현감이 사시나무 떨듯 떨며 소리쳤습니다.
"요, 요물이 나타났다! 뭣들 하느냐, 저 괴물을 당장 베지 않고!"
백선은 허 훈장 앞을 막아서며 품속에서 두툼한 피 묻은 책 한 권과 옥으로 만든 호패를 꺼내 마룻바닥에 던졌습니다.
"배극렴, 네놈이 지난 3년간 백성들에게서 뜯어낸 세곡을 불탄 창고에 숨겨두고, 불을 질러 화적의 소행으로 꾸민 뒤 한양의 영의정에게 뇌물로 바친 비밀 장부가 여기 있다!"
배 현감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습니다. 관아 창고에 불이 났을 때 은밀히 빼돌려 땅속에 묻어둔 자신의 비밀 치부책이었던 것입니다.
"네, 네놈이 그걸 어찌…!"
백선이 삿갓을 벗어 던지자 붉은 여우의 귀가 쫑긋 솟아올랐습니다.
"나는 네놈이 지난봄 산불을 놓아 태워 죽인 산짐승들의 원혼이자, 네놈의 탐욕에 굶어 죽은 백성들의 그림자다. 관아 마당 밑바닥 창고에서 네놈이 숨겨둔 엽전을 훈장님께 가져다 바친 것은 오늘 이 자리에서 네놈의 죄상을 천하에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백선은 매일 밤 허 훈장에게 글을 배우며 사람이 되는 법을 익히는 동시에, 관아 지하를 파고들어 현감의 모든 비리를 기록한 장부를 찾아냈던 것입니다. 허 훈장에게 건넨 엽전은 현감이 도둑맞았다고 거짓 장계를 올린 바로 그 은닉 세곡이었지요.
때마침 관아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암행어사 출두야!"
허 훈장이 조정에 올리려던 상소를 미리 받아보고 잠행 중이던 어사가 군사를 이끌고 들이닥친 것이었습니다. 마룻바닥에 던져진 비밀 장부를 펼쳐 든 암행어사는 배 현감의 죄상을 낱낱이 확인하고는 추상같은 호령을 내렸습니다.
"탐관오리 배극렴을 즉시 포박하여 한양으로 압송하라!"
달빛 속으로 사라진 참된 선비
배 현감은 오라를 받고 끌려나갔고, 허 훈장은 억울한 누명을 벗고 풀려났습니다. 소동이 잦아들고 동헌 뜰에 홀로 선 허 훈장이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백선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서당으로 돌아온 허 훈장의 책상 위에는 정갈하게 접힌 한지 한 장과 맑은 향이 나는 산삼 한 뿌리가 놓여 있었습니다. 종이에는 먹물이 채 마르지 않은 단정한 글씨가 적혀 있었지요.
'스승님께 배운 인의(仁義)의 도리를 흉악한 자를 벌하는 데 썼으니, 소생은 이제 여한이 없이 짐승의 굴레를 벗고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르침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허 훈장은 밤하늘의 둥근 달을 올려다보며 옷소매로 뜨거운 눈물을 훔쳤더랍니다. 옷만 번지르르하게 걸친 위선자보다 짐승의 가죽을 썼으되 사람의 도리를 행한 여우가 참된 선비였음을 가슴 깊이 새기면서 말이지요.
맺으며
사람의 가죽을 쓰고도 짐승보다 못한 짓을 일삼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미물의 탈을 쓰고도 사람보다 더 깊은 의리를 지키는 존재가 있으니 세상일은 참으로 겉만 보고는 알 수 없는 법이지요. 훈장의 맑은 가르침이 짐승의 마음을 울리고, 그 여우가 다시 스승의 목숨을 구했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혹여 여러분도 깊은 밤, 사람의 도리를 묻고자 문을 두드리는 기이한 손님의 발소리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대낮에 마을 처녀로 변장해 양반가의 곳간을 털던 둔갑 너구리의 기막힌 사연이 펼쳐집니다.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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