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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바람이 살을 에는 평양 만경대 나루터에 별안간 엽전 꾸러미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물장수들이 강물을 긷다 말고 넙죽 엎드려 돈을 바치는데, 저 멀리서 이를 번득이는 눈으로 훔쳐보는 사내가 있었지요.
만경대 나루터의 기이한 풍경

조선 순조 임금 시절, 평안도 평양성에는 바람처럼 나타나 허허실실 웃고 다니는 봉이 김선달이라는 사내가 살았습니다.
양반 가문에서 났으나 벼슬길이 막혀 평생을 백수로 지내면서도,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을 울리는 탐관오리와 부패한 장사치를 골려 주는 데는 도가 튼 인물이었지요.
그즈음 한양 운종가에서 고리대금과 매점매석으로 악명이 자자한 만석꾼 배만덕이라는 자가 평양 대동문 앞 주막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배만덕은 돈이라면 피도 눈물도 없는 위인으로, 북선(北船)의 소금길을 독점하려 평양까지 원정을 온 탐욕의 화신이었지요.
하루는 배만덕이 대동강변을 거닐다 기이한 광경을 목격하고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물지게를 진 장정들이 차례로 줄을 서더니, 바위 위에 거만하게 걸터앉은 한 양반 차림의 사내에게 엽전 석 푼씩을 꼬박꼬박 바치고 강물을 퍼 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강물 임자의 능청스런 헛기침

"여보시오, 저 자가 대체 누구관대 다들 물을 긷다 말고 돈을 갖다 바치는 게요?"
배만덕이 턱짓으로 묻자, 옆에 섰던 늙은 사공이 혀를 차며 은밀하게 귀띔했습니다.
"쉿, 목소리 낮추시오. 저분이 바로 선대 조상 대대로 대동강의 물길 권리를 물려받은 김선달 나리요. 평양성 안 물장수들은 저 어른께 통행세를 내지 않으면 강물 한 바가지도 못 뜬다오."
그 말을 들은 배만덕의 가슴팍에서 거센 욕망의 불길이 일렁였습니다.
'흘러넘치는 저 강물을 파는 임자가 따로 있단 말이지? 저 권리만 손에 쥔다면 평양성 수만 가구의 목구멍을 쥐고 평생 은괴를 긁어모으겠구나!'
배만덕은 눈을 번뜩이며 곧장 바위 위로 다가가 김선달 앞에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지요.
"선달 나리, 내 한양에서 장사를 크게 하는 배만덕이라 하오. 나리께서 쥔 저 강물의 통행 권리를 내게 넘겨주실 수는 없겠소?"
김선달은 곰방대를 털며 정색을 하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더랍니다.
"이런 고얀 놈을 보았나! 선조 대대로 피땀 흘려 지켜온 가문의 영지(領地)를 어찌 일개 장사치 놈에게 넘긴단 말이냐? 썩 물러가거라!"
주막집에서 오간 붉은 문서
그러나 배만덕은 물러서지 않고 사흘 낮과 밤을 김선달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며 애걸복걸했습니다.
"선달 나리, 한양의 알짜배기 기와집 세 채 값인 엽전 사천 냥을 당장 결제해 드리겠소! 한 번만 선처해 주시오!"
김선달은 못 이기는 척 주막 구석방으로 배만덕을 불러들여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내 그대의 정성에 감복하여 가문의 비밀을 내어놓는 것이니, 평양 감영에라도 알려지면 내 목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오. 대신 문서에는 정확히 '만경대 앞 대동강 물을 길어 파는 일체의 권리'라 명시해야 하오."
김선달은 품속에서 낡은 비단 첩을 꺼내더니, 평양 감영의 관인이 선명하게 찍힌 누런 양도 문서를 내보였습니다.
배만덕은 눈이 뒤집혀 그 자리에서 사천 냥 환표를 내밀었고, 김선달은 품에서 '벽조목(벼락 맞은 대추나무)'으로 깎은 제 붉은 직인을 꺼내 문서에 쾅 찍어 넘겼지요.
"이 도장이 찍힌 문서가 대동강의 유일한 물길 족보요. 내일부터 저 강물은 온전히 그대의 것이니 마음껏 치부하시오."
김선달은 돈궤를 챙겨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고, 배만덕은 문서를 끌어안은 채 밤새 춤을 추었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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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 마당에 울려 퍼진 통곡
이튿날 아침, 배만덕은 머슴 열 명을 거느리고 득의양양하게 만경대 나루터 바위에 버티고 섰습니다.
"이놈들 듣거라! 오늘부터 대동강 물의 주인은 나 한양 배만덕이다! 물 한 지게에 엽전 열 푼씩을 내지 않는 놈은 뼈를 발라낼 것이니 그리 알아라!"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물장수들은 굽실거리기는커녕 배를 잡고 껄껄 웃어젖히더니, 침을 퉤 뱉고는 그대로 강물을 퍼 담아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놈들이 감히 물 임자의 명을 거역해? 관아에 가서 볼기를 맞아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배만덕은 펄펄 뛰며 물장수들의 멱살을 잡고 평양 감영으로 쳐들어갔지요.
감관 앞에 문서를 들이밀며 소리쳤습니다.
"사또! 내가 이 비싼 문서를 김선달에게 은 사천 냥을 주고 샀는데, 무지한 백성 놈들이 세를 바치지 않고 강물을 도둑질해 가옵니다! 당장 김선달을 잡아들이고 엄벌에 처해 주십시오!"
감관은 문서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더니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짓고는 옆방의 포졸을 불렀습니다.
"여봐라, 저기 나앉은 김선달을 당장 이리로 들이거라."
대동강 물보다 깊은 수탈의 덫
문이 열리자 김선달이 하품을 쩍쩍 하며 당당하게 걸어 들어왔습니다.
배만덕은 삿대질을 하며 거품을 물었습니다.
"네놈이 나에게 사기를 쳤구나! 흐르는 강물이 어떻게 네놈의 것이란 말이냐!"
김선달은 태연하게 소매를 걷어붙이며 사또와 배만덕을 번갈아 쳐다보았더랍니다.
"배 영감, 내 어제 분명 '대동강 물을 길어 파는 권리'를 넘긴다 하였소. 평양 물장수들은 매일 새벽 강물을 길어 성안 사람들에게 팔아 생계를 잇는 자들이오. 나 또한 어제 그들에게 미리 전대에서 엽전 닷 냥씩을 나눠주고 물을 길을 때마다 석 푼씩 되돌려받는 '흉내'를 냈을 뿐이지요."
배만덕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습니다.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냐! 그럼 저 관인이 찍힌 양도 문서는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김선달이 껄껄 웃으며 벼락 맞은 대추나무 도장을 관아 바닥에 굴렸습니다.
"사또 나으리, 저 문서 밑바닥의 작은 글씨를 읽어 보시지요. 저건 감영에서 소인에게 내어준 '봄철 평양성 빈민 구제미 영수증' 뒷면에 적은 각서일 뿐입니다. 애초에 나라 땅이자 백성의 젖줄인 강물을 개인이 사고팔 수 없다는 건 세 살 먹은 아이도 아는 법! 네놈의 탐욕이 눈을 가려 종이 쪼가리에 사천 냥을 쏟아붓고 덤벼든 것 아니냐!"
사또는 배만덕을 매섭게 노려보며 호통을 쳤습니다.
"네놈이 한양에서 악랄하게 백성의 고혈을 빨더니, 이제는 평양 백성들의 목구멍까지 틀어막으려 하였구나! 국법을 희롱하고 강물을 사유화하려 한 죄, 곤장 백 대에 처하고 그 사천 냥은 굶주린 평양 빈민들의 구제미로 전액 귀속한다!"
배만덕은 억울함에 피를 토하며 감영 뜰에서 볼기를 두들겨 맞았고, 뼈마디가 부서진 채 평양성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지요.
맺으며
봉이 김선달은 환표로 바꾼 쌀 수백 섬을 성 안팎의 헐벗은 이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준 뒤, 짚신 한 켤레만 달랑 걸치고 남포 쪽으로 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흐르는 강물에는 주인이 없듯, 사람의 끝없는 욕심도 결국 거센 물결 앞에서는 덧없는 거품에 불과한 법이지요.
혹여 여러분도 눈앞의 헛된 욕심에 눈이 멀어 흐르는 강물을 사려 했던 누군가의 어리석은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한밤중 여우골 주막에서 사라진 정승의 황금 요강과 벙어리 주모의 비밀.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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