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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삼백 석 떼먹은 악덕 지주 안방을 차지한 기이한 상속자의 비밀

지은미소 2026. 10. 19.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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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릿발이 하얗게 내리앉던 숙종 삼십삼년 시월 초하룻날, 충청도 홍주목 갈산리 배판술의 아흔아홉 칸 기와집 대문 앞에 허름한 봇짐 하나 멘 젊은 사내가 우뚝 섰더랍니다.

사내는 대문짝에 걸린 무쇠 문고리를 거세게 쾅쾅 두드리며 목청을 돋웠지요.

"이 집 주인이신 배 영감님 계시오! 내가 이 집의 새 주인이 될 사람이오!"

기왓집을 울린 마른 벼락

문간방에 웅크리고 있던 행랑아범이 기겁하여 달려 나와 사립문을 빼꼼 열었습니다.

"뉘신데 남의 대갓집 문간에서 이리 방자하게 소리를 지르시오?"

행랑아범의 타박에도 젊은 사내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웃음을 흘렸더랍니다.

"네 상전인 배판술 영감을 얼른 불러내거라. 한양서 먼 길을 내려온 정당한 핏줄이니라."

소란을 듣고 사랑채 툇마루에서 여우 털배자를 걸친 배판술이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왔습니다.

배판술은 갈산리 일대의 전답을 모조리 집어삼키고 소작농들의 피고름을 짜내기로 악명이 자자한 자였지요.

"어떤 되바라진 놈이 아침부터 남의 집 마당에서 해괴망측한 소리를 지껄이느냐!"

배판술의 호통에 마당을 쓸던 마름과 머슴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몽둥이를 꼬나쥐었더랍니다.

피땀 흘린 품삯과 억울한 죽음

배판술이라는 자는 원래 부유한 자가 아니었지요.

오 년 전, 이웃 고을 청양에서 온 석수장이자 목수였던 엄진사라는 노인이 이 기와집과 일대 방죽을 축조해 주었더랍니다.

엄 노인은 가난한 석수와 품꾼 쉰 명을 이끌고 삼 년 밤낮으로 돌을 깨고 대들보를 올려 대궐 같은 집을 지어 주었지요.

그러나 집이 완공되던 날, 배판술은 약조했던 쌀 삼백 석의 품삯을 단 한 톨도 내놓지 않았습니다.

"관가에 호소하려거든 어디 해 보아라! 네놈들이 빼돌린 자재 값이 쌀 오백 석은 족히 넘으니, 외려 관아에 압송될 놈들은 너희니라!"

배판술의 모진 협박과 사또와의 결탁 앞에 엄 노인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지요.

품삯을 받지 못해 굶어 죽어간 일꾼들의 원망을 온몸으로 받아낸 엄 노인은 결국 그해 겨울 눈밭에서 한을 품고 숨을 거두었더랍니다.

배판술은 그 피눈물 위에 서서 호의호식하며 갈산리의 왕처럼 군림하고 있었지요.

당당한 불청객과 붉은 인장

문간에 선 젊은 사내는 품속에서 누렇게 바랜 종이 한 장을 꺼내 배판술의 코앞에 들이밀었습니다.

"내 이름은 엄도원이오. 오 년 전 억울하게 돌아가신 엄 노인의 외아들이자 법적 상속인이오!"

배판술은 코웃음을 치며 턱수염을 쓸어내렸더랍니다.

"그 늙은 찰흙쟁이 아들이라고? 그래, 네놈이 감히 내 집을 물려받겠다고 헛소리를 지껄여?"

엄도원은 눈을 부라리며 문서를 쫙 펼쳤지요.

"헛소리가 아니오. 부친께서 숨을 거두시기 전 남기신 공증 문서요! 이 집의 터와 건물은 완공 후 품삯 쌀 삼백 석을 온전히 치르기 전까지는 부친의 소유로 남긴다는 배 영감의 수결이 선명히 찍혀 있소!"

과연 문서 귀퉁이에는 배판술의 도장과 함께, 배판술이 스무 해 전 관아에 등록했던 붉은 흑단목 인장이 찍혀 있었습니다.

배판술의 안색이 찰흙처럼 파랗게 질려갔지요.

그것은 오 년 전, 공사를 시작할 때 엄 노인의 솜씨를 탐내어 얼결에 써 주었던 이면 계약서였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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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장 속에 감춰둔 비수

"네놈이 어찌 그 종가나부랭이를 가지고 있느냐! 썩 물러가지 못할까! 여봐라, 이 미친놈을 당장 멍석말이해라!"

배판술의 모진 호령에 머슴들이 몽둥이를 치켜들고 엄도원에게 달려들었지요.

그 순간, 대문 밖에서 쩌렁쩌렁한 기침 소리와 함께 홍주 목사의 포졸들이 들이닥쳤더랍니다.

"갈산리 배판술은 듣거라! 네놈의 위조와 갈취에 관한 송사가 한양 한성부와 이곳 목관아에 정식 접수되었느니라!"

홍주 목사 뒤로 의금부 관복을 입은 관원이 서 있었으니, 배판술의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엄도원이 목사를 향해 읍하며 소리쳤지요.

"사또 나으리, 배판술은 부친의 노역을 착취했을 뿐 아니라, 품삯을 숨겨두고 파산했다며 거짓 송사를 올렸습니다. 그 증거가 이 안채 대청마루 밑에 숨겨져 있습니다!"

배판술은 펄쩍 뛰며 발악을 했습니다.

"새빨간 거짓말이오! 내 마루 밑에 쌀이나 돈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소!"

드러난 대반전, 먹줄의 기억

엄도원은 차분하게 대청마루 중앙의 느티나무 기둥으로 걸어가 바닥을 쾅 내리밟았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돌과 나무를 다루는 최고의 장인이셨소. 자신이 지은 집에 사기꾼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비밀을 남겨두셨지."

엄도원은 기둥 밑동의 감쪽같이 숨겨진 나무못 세 개를 차례로 눌렀더랍니다.

그러자 덜컹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대청마루 한 귀퉁이가 거짓말처럼 아래로 푹 꺼지며 거대한 지하 비밀창고가 입을 벌렸지요.

그 지하 창고 안에는 쌀가마니 대신, 배판술이 지난 십 년간 소작농들에게서 강제로 빼앗아 숨겨둔 금은보화와 관아 관리들에게 뇌물을 바친 비밀 장부가 빽빽이 쌓여 있었습니다.

"이, 이것이 어찌하여 여기에…!"

배판술이 털썩 무릎을 꿇으며 혀를 깨물 지경이 되었더랍니다.

엄 노인은 집을 지을 적에 이미 배판술의 사악한 흉계를 꿰뚫어 보고, 그의 장부와 비자금을 숨길 비밀 공간을 만들어 주면서 오직 자신들의 핏줄만이 열 수 있는 잠금 쐐기를 박아두었던 것이지요.

포졸들이 들이닥쳐 배판술의 목에 무거운 칼을 씌웠습니다.

"악덕 지주 배판술은 소작농들의 전답을 강탈하고 뇌물로 조정을 어지럽혔으니, 재산을 몰수하고 변방으로 위리안치형에 처한다!"

엄도원은 마당에 엎드려 울고 있는 가난한 품꾼들과 소작농들을 향해 돌아섰지요.

"이 집과 창고에 든 재물은 본디 여러분의 피땀이었습니다. 밀린 품삯과 빼앗긴 땅을 모두 온전히 돌려드리겠습니다."

맺으며

악으로 쌓아 올린 아흔아홉 칸 기왓집은 결국 그 피땀을 흘린 이들의 품으로 고스란히 돌아갔더랍니다.

남의 눈에 피눈물을 내며 제 잇속만 챙기려 든 자의 말로는 이토록 서글프고 비참한 법이지요.

여러분 곁에도 겉으로는 당당하나 속으로는 남의 것을 가로채어 배를 불리는 배판술 같은 자가 있지는 않습니까?

다음 이야기 예고: 한밤중 외딴 산막을 찾아와 죽은 지아비의 유언장을 고쳐 달라 애원하는 여인의 기괴한 사연.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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