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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얼음 언 고갯길서 거지에게 누더기 두루마기 벗어준 장돌뱅이의 뜻밖의 횡재

지은미소 2026. 10. 18.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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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을 에는 삭풍이 문풍지를 찢을 듯 울어대던 숙종 십육년 동짓달, 평안도 영변 땅 백운령 고갯마루에는 피비린내 나는 욕심과 눈물겨운 온정이 한데 뒤엉켜 소용돌이치고 있었지요.

손발이 꽁꽁 얼어붙어 까마귀조차 날기를 포기한 그 험한 빙판길에서, 한 사내의 운명을 송두리째 뒤흔든 기이한 만남이 시작되었더랍니다.

꽁꽁 언 고갯길의 헌 두루마기

평안도 장터를 떠돌며 바늘과 무명필을 팔던 봇짐장수 배칠성은 천성이 우직하고 여린 사내였습니다.

팔십 노모의 약값 백 냥을 마련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십 년 넘게 무거운 봇짐을 지고 삼남과 이북을 발이 부르트도록 헤맸지만, 손에 쥔 돈은 늘 푼돈뿐이었지요.

그날도 영변 장에서 남은 봇짐을 바리바리 싸 쥐고 백운령을 넘던 중, 길섶 눈구덩이 속에서 웅크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한 노인을 발견했더랍니다.

"아이고, 여보시오! 정신 좀 차려보시오!"

칠성이 급히 다가가 흔들어보니, 노인은 누더기 한 장 걸치지 못한 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눈먼 거지였지요.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판인데, 거친 손을 허우적거리며 바들바들 떨고 있었습니다.

칠성은 주저 없이 제 등에서 하나뿐인 낡은 솜두루마기를 훌훌 벗어 노인의 언 몸을 꽁꽁 싸매주었지요.

그러고는 봇짐 깊숙이 아껴두었던 마른 조밥 덩어리를 쪼개 노인의 입에 조금씩 넣어주었습니다.

"눈먼 영감님, 이 험한 날씨에 어쩌자고 홀로 여길 넘으려 하셨소. 이 옷이라도 덮고 계시오."

노인은 조밥을 오물거리더니, 초점 없는 눈을 깜빡이며 칠성의 손을 덥석 쥐었더랍니다.

"임자, 이 은혜를 어찌 갚는단 말이오. 혹 등짐에 놋쇠 숟가락 하나 남아 있거든 내게 쥐여줄 수 없겠소? 길바닥에서 밥이라도 빌어먹으려면 숟가락 하나는 있어야 하니 말이오."

칠성은 가진 것 중 흠집이 나 팔지 못하던 놋숟가락 하나를 꺼내 노인의 손에 꼭 쥐여주었습니다.

노인은 그 숟가락 자루 끝을 손톱으로 긁적거리더니, 칠성의 얼굴 쪽을 가만히 응시하며 읊조렸지요.

"네 이름이 무엇이냐?"

"영변 사는 배칠성이라 합니다."

"칠성이라…… 참으로 맑은 이름이로다. 평양 대동문 앞 객주골의 만석꾼 조진사를 찾아가거라. 그곳 담장 밑 썩은 향나무를 조심하라는 말을 전하면, 네 잃어버린 겉옷 값을 후하게 쳐줄 것이다."

칠성은 정신이 온전치 못한 늙은이의 헛소리려니 여기며, 노인을 인근 산막으로 안전하게 옮겨다 주고는 홑저고리 차림으로 이를 덜덜 떨며 산을 내려왔더랍니다.

탐욕스런 객주와 불타버린 창고

평양부로 내려간 칠성은 노인의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지요.

노모의 약값이 턱없이 모자라 애가 타던 칠성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대동문 앞 조진사의 거대한 기와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조진사는 인근에서 소문난 지독한 구두쇠에 탐욕스러운 모리배였습니다.

가난한 소작인들의 곡식을 가혹하게 수탈하고, 빚을 갚지 못하면 자식까지 팔아넘기게 만드는 냉혈한이었지요.

칠성이 대문간에 서서 하인을 통해 백운령 노인의 전갈을 전하자, 사랑채에서 낮잠을 자던 조진사가 버선발로 뛰어나왔습니다.

"뭣이? 썩은 향나무를 조심하라 했다고? 그 노인이 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더냐!"

조진사의 눈빛에 일순 번뜩이는 살기와 당혹감이 스쳤더랍니다.

칠성이 백운령 고갯마루에서 눈먼 거지 노인에게 옷을 벗어주고 숟가락을 건넨 사연을 털어놓자, 조진사는 턱수염을 바르르 떨었지요.

"그 영감이 살아있었단 말이지…… 흠, 내 너에게 큰 상을 내릴 터이니 당장 하룻밤 우리 행랑채에서 쉬거라."

하지만 그날 밤, 칠성은 흉흉한 기운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야심한 자정 무렵, 문밖에서 조진사와 심복의 은밀한 목소리가 들려왔더랍니다.

"그 장돌뱅이 놈이 노인의 거처를 알고 있으니 살려둘 수 없다. 오늘 밤 행랑채에 불을 놓아 쥐도 새도 모르게 태워 죽여라. 그래야 선대 대감의 숨겨진 비자금 문서의 행방을 영원히 묻을 수 있다!"

화들짝 놀란 칠성은 뒷창문을 부수고 가까스로 탈출했고, 불길이 행랑채를 집어삼키는 광경을 뒷산 숲속에서 숨죽여 지켜보며 간담이 서늘해졌지요.

썩은 향나무 밑의 비밀

간신히 목숨을 건진 칠성은 날이 밝자마자 관아로 달려가려 했으나, 뚜렷한 증거도 없는 일개 장돌뱅이의 말을 사또가 믿어줄 리 만무했습니다.

'그 노인이 왜 하필 썩은 향나무를 조심하라고 했을까?'

칠성은 불탄 조진사의 집 뒤편을 몰래 살폈습니다.

놀랍게도 조진사의 본채 뒤뜰 후미진 곳에 벼락을 맞아 거멓게 죽은 아름드리 썩은 향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지요.

조진사가 불탄 행랑채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칠성은 향나무 주변으로 조심스럽게 숨어들었습니다.

향나무 밑동 아래쪽 흙은 최근에 누군가 파헤친 듯 풀이 죽어 있었지요.

칠성이 나뭇가지를 주워 흙을 파내자, 단단한 돌판 아래에서 옻칠을 한 자그마한 궤짝 하나가 덜컥 걸려 나왔습니다.

궤짝을 열어본 칠성은 턱이 빠질 만큼 놀라고 말았더랍니다.

그 안에는 눈이 번쩍 뜨이는 황금 두꺼비 세 쌍과 함께 관인이 선명하게 찍힌 토지 문서, 그리고 한 장의 혈서가 들어있었지요.

'불충한 노비 조득만(조진사의 본명)이 주인을 독살하고 재산을 찬탈하였으니, 이를 바로잡는 자에게 가산의 절반을 주리라.'

그 혈서 끝에는 칠성이 백운령에서 노인에게 준 것과 똑같은 문양이 새겨진 가문의 낙관이 찍혀 있었습니다.

드러난 진실과 통쾌한 포박

바로 그 순간, 뒤에서 서슬 퍼런 쇠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디서 쥐새끼 같은 놈이 감히 내 가문의 보물을 훔치려 드느냐!"

조진사가 몽둥이를 든 장정 대여섯 명을 거느리고 칠성을 겹겹이 에워싼 것이었지요.

조진사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네놈이 용케 불길은 피했으나 네 발로 무덤을 찾아왔구나. 어차피 그 눈먼 늙은이도 산속에서 얼어 죽었을 터, 너만 입을 다물면 이 평양 땅의 모든 부는 영원히 내 것이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갑자기 담장 너머로 우렁찬 호령이 터져 나왔습니다.

"포졸들은 당장 저 패륜한 역적 놈을 결박하라!"

우르르 문을 부수고 들이닥친 평양 감영의 포도군관들이 조진사와 그 수하들을 순식간에 제압해 버렸지요.

포졸들의 호위를 받으며 가마에서 내린 인물은 다름 아닌, 말끔한 비단 도포를 차려입은 노인이었더랍니다.

비록 눈은 멀었으나 당당한 기품이 서려 있는 그 노인의 손에는, 칠성이 건네주었던 바로 그 흠집 난 놋숟가락이 들려 있었지요.

"득만아, 네놈이 내 눈을 멀게 하고 절벽 아래로 밀어 넣었으나, 하늘의 그물은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법이다!"

노인의 진짜 신분은 전직 한성부 판윤을 지낸 거유이자 평양의 대지주였던 신대감이었습니다.

신대감은 칠성이 준 솜두루마기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뒤, 지나가던 관아 순찰대에 구조되어 몸을 추슬렀던 것이지요.

신대감은 칠성의 품에서 나온 혈서와 놋숟가락을 증거로 사또에게 보이며 조진사의 추악한 죄상을 낱낱이 밝혔습니다.

조진사는 대역부도와 살인미수 죄로 그 자리에서 오라를 받고 평생 압록강 변으로 귀양을 떠나는 신세가 되었더랍니다.

맺으며

신대감은 목숨을 구해준 보답이자 은혜를 갚는 징표로, 되찾은 조진사의 거대한 전답 백 마지기와 기와집 한 채를 칠성에게 아낌없이 내어주었습니다.

헐벗은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제 마지막 온기를 나누었던 가난한 봇짐장수가, 하룻밤 사이에 어머니를 모시고 수천 석을 거두는 당당한 대지주가 되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지요.

세상 사람들은 칠성의 그 낡은 솜두루마기를 일컬어 '천금을 부른 옷자락'이라 부르며 입을 모아 칭찬했답니다.

혹여 여러분도 꽁꽁 얼어붙은 겨울날, 뜻밖의 작은 나눔이 기적 같은 복으로 되돌아온 사연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밤마다 서당 훈장의 밥상을 훔쳐 먹던 구미호가 과거 급제 방을 들고 나타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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