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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대왕 시절, 충청도 홍주 땅의 소문난 부자 배진사네 대문 앞에는 매일 아침 피비린내 나는 닭 모가지가 걸려 있곤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배진사의 탐욕에 한을 품고 죽은 박 훈장의 원혼이 곡을 하는 것이라며 쑥덕거렸지만, 정작 배진사는 코방귀만 뀌며 하인들을 닦달할 뿐이었지요.
피로 맺은 사돈의 맹세

홍주 읍내에서 서당을 열던 박 훈장 박문규는 본래 성품이 올곧고 재산도 넉넉한 천석꾼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장차 가문을 이을 총명한 외아들 박진우가 있었지요. 반면 같은 고을의 배만복은 노름과 흉년으로 가산이 거덜 나 당장 길거리에 나앉을 처지였습니다.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죽마고우였던 터라, 박 훈장은 차마 배만복의 파멸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박 훈장은 제 논밭 절반을 떼어 배만복의 빚을 갚아 주고, 자신의 아들 진우와 배만복의 고명딸 배연화를 혼약시켰습니다.
"배 형, 우리 집안과 아우의 집안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하나요. 자, 이 옥패를 반으로 쪼개어 나눠 가집시다. 훗날 아이들이 장성하면 이 반쪽 옥패를 맞추어 백년가약을 맺도록 합시다."
박 훈장은 가보로 내려오던 푸른 청옥패를 반으로 쪼개어 한 조각을 배만복의 손에 쥐여 주었습니다. 배만복은 눈물을 흘리며 박 훈장의 발앞에 엎드렸지요.
"박 형, 이 은혜는 내 평생 목숨을 바쳐서라도 갚겠소. 만약 내가 이 맹세를 어기면 천벌을 받아 혓바닥이 뽑힐 것이오."
탐욕이 부른 배신의 덫

그러나 몇 해 지나지 않아 호사다마라 했던가요, 박 훈장의 집에 큰 불길이 덮쳤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기와집과 남은 곡간이 잿더미로 변했고, 박 훈장의 아내마저 연기에 질식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박 훈장은 졸지에 빈털터리가 되었고, 충격으로 눈까지 멀어 버렸습니다. 박 훈장은 어린 아들 진우의 손을 더듬거리며 사돈인 배만복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사이 박 훈장의 도움으로 다시 천석꾼 소리를 듣게 된 배만복이었지요.
"사돈, 내 눈이 멀고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으나 다행히 진우는 무탈하오. 염치없지만 약조대로 연화와 혼사를 치르고, 우리 부자가 행랑채 한 칸이라도 빌려 쓸 수 있게 해 주시오."
하지만 눈앞에 선 배만복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습니다. 번듯한 사위를 얻어 한양 세도가와 연을 맺으려던 배만복에게 앞 못 보는 거지꼴의 사돈과 알거지 사위는 눈엣가시일 뿐이었습니다.
"허허, 박 형. 사람이 분수를 알아야지. 맹인 늙은이와 거렁뱅이 놈에게 내 귀한 딸을 주라니요? 게다가 옛날에 준 돈은 형님이 호의로 준 것이지 내가 갚을 빚은 아니잖소?"
배만복은 박 훈장이 꺼내 든 반쪽 청옥패를 낚아채 마당 바위에 내동댕이쳤습니다. 청옥패는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박살이 났습니다.
"여봐라! 이 추잡한 거렁뱅이 놈들을 몽둥이로 당장 두들겨 패서 쫓아내라!"
하인들의 모진 매질에 박 훈장은 피를 토하며 길바닥에 쓰러졌고, 그 길로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어린 진우는 아버지의 시신을 끌어안고 피눈물을 흘리며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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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암행어사의 행차
그로부터 십 년이라는 세월이 쏜살같이 흘렀습니다. 배만복은 진사 벼슬을 돈으로 사고, 딸 연화를 한양 판서 판서댁 서자와 맺어주려 혼례를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온 집안에 잔치 준비가 한창이던 그날, 홍주 관아에 난데없는 파발이 당도했습니다.
조정에서 호서 지방의 민정을 살피기 위해 암행어사를 파견했다는 소식이었지요. 그런데 소문이 참으로 기이했습니다. 이번에 내려온 어사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지만, 사람의 목소리와 숨소리만 듣고도 죄를 꿰뚫어 본다는 괴짜라는 것이었습니다.
잔치 날 아침, 배진사의 집 마당에 지팡이를 짚은 허름한 도포 차림의 맹인 걸인이 들어섰습니다. 누더기 삿갓을 푹 눌러쓴 사내였습니다.
"잔칫집에 떡 한 조각 주지 않고 박대하면 천벌을 받는다 들었소. 배진사 영감, 적선 좀 하시오."
배진사는 잔칫날 아침부터 재수 없게 장님이 들었다며 삿대질을 했습니다.
"어디서 냄새나는 맹인 놈이 남의 경사에 주둥이를 놀리느냐! 하인 놈들은 무얼 하느냐, 저놈의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개천에 버려라!"
하인들이 몽둥이를 치켜들고 달려드는 순간, 맹인 걸인이 지팡이를 번쩍 들어 하인의 어깨를 내리쳤습니다. 퍽 소리와 함께 장정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습니다. 걸인은 품속에서 번쩍이는 구리 쇠패를 높이 쳐들며 벼락같은 고함을 질렀습니다.
"암행어사 출도야! 역졸들은 들으라! 이 집안의 죄인을 단 한 놈도 놓치지 마라!"
맞추어진 옥패의 진실
담장을 뛰어넘은 역졸들이 배진사네 안마당을 순식간에 에워쌌습니다. 배진사는 사시나무 떨듯 떨며 마당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어, 어사또! 소인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러십니까? 소인은 억울합니다!"
맹인 어사는 삿갓을 벗어 던졌습니다. 그의 두 눈은 멀쩡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어사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배진사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배만복, 네놈은 정말로 내가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으로 보이느냐?"
배진사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어사의 얼굴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 이목구비는 십 년 전 피눈물을 흘리며 아비의 시신을 안고 떠났던 소년, 박진우의 얼굴 그대로였습니다. 박진우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 끝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어사화(御史花)를 머리에 꽂았던 것입니다.
"자, 이것을 보아라."
어사 박진우는 품속에서 비단 보자기 하나를 꺼내 펼쳤습니다. 그 안에는 십 년 전 배진사가 마당에 내던져 깨뜨렸던 청옥패 조각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네놈이 박살 내었던 우리 가문의 정혼패다. 부서진 조각을 내가 십 년간 품고 다니며 하나하나 풀로 이어 붙였지.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가운데 한 조각이 비더구나."
박진우는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배진사의 상투관을 내리쳤습니다. 상투관이 쪼개지며 그 안에 숨겨져 있던 푸른 옥 조각 하나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습니다. 배진사가 제 가보로 삼겠다며 몰래 챙겨 두었던 바로 그 반쪽 옥패의 부스러기였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조각을 가져다 대자, 청옥패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온전한 원형을 이루었습니다.
"네놈은 내 아버지가 베푼 전답으로 부를 쌓고도, 아버지가 눈이 멀자 때려죽이고 그 징표마저 빼앗아 숨겼다. 은혜를 원수로 갚고 천륜을 저버린 죄, 네놈의 혓바닥을 뽑아도 시원찮을 것이다!"
배진사는 혀가 굳어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한 채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피를 흘렸습니다.
맺으며
배만복은 사돈을 배신하고 모살(謀殺)에 이르게 한 죄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전 재산을 몰수당한 채 절해고도로 귀양을 떠났습니다. 박진우는 아버지의 신원을 회복하여 양지바른 곳에 모셨고, 배만복이 가로챘던 가산은 고을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었더랍니다.
세상에 쏟아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고, 악행으로 쌓은 기와집은 모래성처럼 허망하게 무너지는 법이지요. 여러분 주변에도 남의 눈물을 발판 삼아 배를 불리다 결국 제 꾀에 넘어가 버린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다음 이야기 예고: 한밤중 외딴 주막에서 시신을 염하던 늙은 장의사가 관 뚜껑 속에서 마주한 기이한 혼례 손님.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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