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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릿발이 매섭게 몰아치던 숙종 이십 년의 겨울밤이었습니다. 충청도 목천현의 세도가 배 진사 댁 솟을대문 밖으로 피투성이가 된 사내가 가마니 짝처럼 내던져졌지요.
"네놈이 감히 종년과 눈이 맞아 내 귀한 백자 항아리를 훔쳐 달아나려 해? 내 당장 관가에 넘겨 능지처참을 시킬 것이로되, 그간 부려먹은 정이 있어 목숨만 살려주마!"
피 묻은 가마니와 놋숟가락

문이 쾅 닫히고, 눈밭에 처박힌 사내의 이름은 바우였습니다. 바우는 일곱 살 적에 흉년을 만나 배 진사 댁에 스스로 몸을 판 붙박이 머슴이었지요. 천성이 우직하고 꾀를 부릴 줄 몰라 마구간 치우는 일부터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던 충직한 종이었습니다.
그런 바우에게 유일한 피붙이나 다름없던 이는 안채 식모살이를 하던 점순이라는 처자였습니다. 배 진사는 바우의 성실함을 칭찬하기는커녕, 바우가 장성하자 점순이를 이웃 고을 첩실로 팔아넘겨 노자나 챙기려 들었더랍니다. 바우가 이를 알고 점순이를 빼돌리려 했다는 해괴한 누명을 씌워 멍석말이를 해버린 것이지요.
진짜 도둑은 따로 있었습니다. 진사의 망나니 장남이 노름빚을 갚으려고 가보인 백자 달항아리를 빼돌렸는데, 그 죗값을 바우에게 고스란히 뒤집어씌운 채 야밤에 피투성이로 내쫓은 것이었지요. 눈물범벅이 된 바우의 손안에는 어미가 물려준 낡은 놋숟가락 하나만이 쥐여 있었습니다. 자루 끝에 굵은 칼자국이 세 개나 새겨진, 바우 가문의 유일한 유품이었지요.
어둠 속의 스승과 사라진 십 년

숨이 끊어지기 직전, 바우를 거둔 이는 고을 외곽 낡은 초옥에 홀로 살던 낙향한 선비 한 노인이었습니다. 한때 조정에서 대제학을 지냈으나 간신배들의 모함으로 벼슬을 버리고 숨어 지내던 기 선비였지요.
"원통합니다, 나리. 도둑놈은 따로 있는데 제 등에 멍석을 말고 뼈가 부서지도록 쳤습니다. 힘없는 종놈은 그저 개돼지처럼 밟혀 죽어야 하는 것입니까?"
"억울하냐? 눈물로는 피를 씻지 못하고, 도끼질로는 하늘을 벨 수 없는 법이다. 칼 대신 붓을 쥐어라. 네 억울함을 씻는 길은 저들보다 더 높은 법의 칼을 쥐는 것뿐이다."
바우의 눈빛에서 범상치 않은 기상을 본 기 선비는 바우에게 '윤호(潤浩)'라는 새 이름을 주었습니다.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기름때 묻은 손으로 글을 읽었지요. 타고난 총명함에 원통함을 삭이는 독기까지 더해지니, 책 한 권을 사흘 만에 통째로 외워 버렸더랍니다. 그렇게 세월은 물처럼 흘러 십 년이란 시간이 덧없이 지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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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님 잔칫날에 나타난 거지 손님
십 년 뒤 목천현에는 새로운 사또가 부임해 왔는데, 탐욕스럽기로 소문난 자였습니다. 배 진사는 자신의 환갑을 맞아 새 사또를 안채로 초대해 거나한 잔치를 벌였지요. 마당에는 기름진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했고, 기생들의 가야금 소리가 담장을 넘었습니다.
한참 주흥이 올랐을 무렵, 대문 밖에서 낡아빠진 누더기를 걸치고 갓이 반쯤 부서진 거지가 쑥 들어섰습니다.
"배가 고파 염치 불구하고 들어왔소이다. 진사 어른의 경사스러운 날이니 밥 한 덩이 베풀어 주시오."
배 진사는 얼굴을 찌푸리며 하인들을 불렀습니다.
"어디서 옴 오른 거지새끼가 기어들어 와 잔치판을 망치는 게냐! 여봐라, 당장 저놈을 개 패듯 패서 내쫓아라!"
하인들이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자, 거지는 껄껄 웃으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 위에 탕 내려놓았습니다. 그것은 자루 끝에 세 개의 칼자국이 깊게 파인 낡은 놋숟가락이었습니다.
"진사 어른, 십 년 전 이 숟가락 하나만 쥐고 쫓겨난 머슴놈을 기억하십니까?"
어사출두와 밝혀진 백자 항아리
배 진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너, 너는 바우놈이 아니더냐? 죽지도 않고 살아서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나타나 행패질이냐!"
옆에 앉아 있던 사또도 상을 치며 호통을 쳤습니다.
"감히 관가의 수령이 함께한 자리에서 천한 놈이 소란을 피우다니, 여봐라! 저놈을 당장 결박하여 하옥하라!"
그 순간, 누더기를 입은 바우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습니다. 바우는 낡은 도포를 홑이불 벗기듯 훌러덩 벗어던졌습니다. 그 안에서 찬란한 푸른빛의 관복과 함께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둥근 쇠패가 모습을 드러냈지요.
"암행어사 출도야!"
대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십 명의 역졸들이 와아 함성을 지르며 안마당으로 들이닥쳤습니다. 배 진사와 사또는 사시나무 떨듯 떨며 댓돌 아래로 굴러떨어졌습니다.
"목천현감은 들으라! 네놈은 배 진사에게 뇌물을 받고 그의 온갖 수탈과 양민 학대를 묵인하였으니 직첩을 회수하고 옥에 가둘 것이다! 그리고 배 진사, 네놈은 가보 백자를 장남의 노름빚으로 날리고는 죄 없는 머슴에게 도둑 누명을 씌워 죽이려 하였지? 그 백자 항아리는 이미 도성 암거래 장부에서 확인하여 압수해 두었다!"
맺으며
배 진사는 백자 항아리의 행방까지 낱낱이 밝혀지자 넋을 잃고 엎드려 머리를 찧으며 목숨만 살려달라 빌었더랍니다. 십 년 전 피투성이로 쫓겨났던 바우, 아니 어사 박윤호는 악독한 진사의 재산을 몰수하여 가난한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었고, 억울하게 팔려 갈 뻔했던 점순이를 찾아내어 자유로운 양민의 신분으로 되돌려 주었지요. 원한을 복수가 아닌 엄정한 국법으로 갚아낸 바우의 발걸음은 참으로 당당하고 시원스러웠습니다.
여러분도 혹시 억울한 일을 겪고도 묵묵히 칼을 갈아 때를 기다렸던 사람의 통쾌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다음 이야기 예고: 밤마다 무덤가에서 소복을 입고 피리를 부는 처녀의 정체는?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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