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 필을 빌려 간 거지가 암행어사가 되어 악덕 사또를 포박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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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놈이 도적 떼의 괴수와 내통하여 역모를 꾀했다는 고변이 들어왔다! 바른대로 대지 못할까!”
시퍼런 서슬이 번뜩이는 칼날 아래, 남루한 도포를 걸친 양반 하나가 관아 뜰 바닥에 꿇어앉아 피를 토하고 있었습니다. 죄목은 국경을 넘나드는 마적패에게 군마(軍馬)를 몰래 대주었다는 것. 억울한 누명을 쓴 이의 등 뒤로, 고을 사또의 음흉한 비웃음이 뱀처럼 차갑게 흘러내렸더랍니다.
비바람 치던 밤의 손님

때는 조선 선조 시절, 충청도 옥천 땅의 외딴 산골마을이었습니다. 그곳에는 벼슬길에는 뜻이 없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며 학문에만 힘쓰던 성진우라는 선비가 살고 있었지요. 가진 재산이라곤 선친이 물려준 마른 밭 몇 뙈기와, 어린 시절부터 자식처럼 아끼며 길러온 갈기 붉은 명마 ‘적풍(赤風)’ 한 필이 전부였습니다. 성 선비의 유일한 바람은 언젠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신원을 회복하고, 가문을 욕되지 않게 지키며 조용히 늙어가는 것이었지요.
비바람이 장독대를 때리던 어느 늦은 가을밤, 사립문 밖에서 거친 숨소리와 함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주인장 계시오! 지나가는 과객이온데 하룻밤만 몸을 뉘어가게 해주시오!”
성 선비가 문을 열어보니, 삿갓 아래로 흙탕물을 뒤집어쓴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옷은 다 헤어져 살이 비쳤고, 짚신조차 닳아빠져 맨발에선 붉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지요.
성 선비는 두말없이 그를 방으로 들이고, 솥에 남은 식은 밥 한 덩이와 따뜻한 숭늉을 내주었습니다. 과객은 게눈 감추듯 밥그릇을 비우더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소생의 이름은 이몽선이라 합니다. 한양으로 가야 하는데 노자가 떨어져 발이 묶였습니다. 내일까지 당도하지 못하면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됩니다.”
성 선비는 그의 눈빛이 비록 행색은 비천하나 맑고 깊은 뜻을 품고 있음을 단박에 알아보았지요.
말 한 필을 내어준 선비

이몽선이 한양으로 급히 가야 하는 이유는 노모의 위독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비바람에 다리가 부러져 절뚝이는 다리로 한양까지 천리 길을 걸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성 선비는 잠시 마당의 마구간을 바라보더니 깊은 결심을 내렸습니다.
“이 사람, 내게 가진 돈은 없으나 마구간에 말 한 필이 있네. 자식처럼 아끼는 ‘적풍’이라는 놈인데, 발이 빨라 하루에 삼백 리는 족히 달리지. 이 말을 타고 가시게.”
이몽선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사래를 쳤습니다.
“아니 됩니다! 선비님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말을 어찌 초면인 거지 과객에게 덜컥 내어주신단 말입니까! 제가 말을 팔아 도망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성 선비는 껄껄 웃으며 말의 고삐와 함께 작은 나무패 하나를 건넸습니다. 나무패 뒷면에는 성 선비의 선친이 남긴 붉은 낙관이 찍혀 있었지요.
“말은 사람을 알아보고,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 법이오. 적풍의 귀 뒤를 가만히 쓸어주면 천릿길도 지치지 않고 달릴 것이네. 일이 끝나거든 언제든 편할 때 돌려보내 주시게나.”
이몽선은 말없이 붉은 나무패를 품에 넣고 성 선비에게 큰절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새벽안개를 뚫고 붉은 말 적풍의 등에 올라탄 채 어둠 속으로 사라졌지요.
탐관오리의 음모와 옥살이
그러나 선의로 베푼 일이 화근이 될 줄이야 뉘 알았겠습니까. 옥천 고을의 사또 배극태는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기로 악명이 자자한 탐관오리였습니다. 배 사또는 평소 성 선비가 백성들에게 신망이 높고, 자신의 비리를 장계로 올리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었지요. 게다가 배 사또는 성 선비의 명마 적풍을 오래전부터 탐내어 여러 번 팔라고 겁박했으나 거절당한 원한이 있었습니다.
사또는 부하들을 풀어 성 선비의 집을 감시하던 중, 말이 사라진 것을 포착했습니다.
“성진우 그놈이 애지중지하던 명마를 북방에서 내려온 도적패에게 팔아넘겨 군자금을 마련했다는 구실을 만들어라! 이번 기회에 놈을 반역죄로 엮어 가산을 몰수하고 목을 베겠다!”
배 사또의 명을 받은 이방과 포졸들이 성 선비의 사립문을 부수고 들이닥쳤습니다.
“네 이놈 성진우! 나라의 군마로 징발될 명마를 도적 떼에게 몰래 넘겨 반역을 꾀했렸다!”
성 선비는 포졸들에게 결박당하며 외쳤습니다.
“무슨 당치 않은 소리요! 나는 길 잃은 과객에게 말을 빌려주었을 뿐이오!”
“거짓말 마라! 그 과객이란 놈이 북쪽 마적패의 밀정이라는 증좌가 관아에 접수되었다!”
관아로 끌려간 성 선비는 매질과 주리를 트는 모진 고초를 겪으며 차디찬 토옥에 갇히고 말았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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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전날 밤의 단서
성 선비의 사형 집행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배 사또는 성 선비가 반역을 자백했다는 거짓 문서를 꾸며 한양의 형조에 올렸고, 이미 사형 집행 교지만을 기다리는 처지였지요. 마을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관아 문을 두드렸으나, 포졸들의 몽둥이질에 쫓겨날 뿐이었습니다.
옥바라지를 하던 늙은 종이 눈물을 흘리며 옥창살 너머로 속삭였습니다.
“나리, 이대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으시면 어찌합니까. 그 과객이란 자는 필시 도둑놈이 분명합니다. 어찌 그런 자에게 말을 주셨습니까!”
성 선비는 피투성이가 된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습니다.
“그의 눈빛은 결코 도적의 것이 아니었다. 비록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사람을 믿은 내 마음까지는 죽지 않는다.”
성 선비가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자신이 과객에게 건넸던 그 붉은 나무패였습니다. 그 패는 단순한 마패가 아니라, 선친께서 과거에 급제했을 때 하사받았던 유품으로, 뒷면에 가문의 비밀스러운 음각이 새겨져 있었지요. 만약 그 자가 진짜 도적이었다면, 그 패는 이미 어느 전당포에 헐값으로 버려졌을 터였습니다.
동헌에 울려 퍼진 마패 소리
마침내 형 집행 당일, 백성들이 멍석이 깔린 처형장 주변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배 사또는 의기양양하게 단상에 앉아 붓을 들고 사형 집행장에 서명하려 했지요.
“죄인 성진우는 마적과 내통하여 국경을 어지럽히려 했으니, 그 죄는 능지처참에 처함이 마땅하나 특별히 참수형으로 다스린다! 망나니는 칼을 들어라!”
망나니가 칼춤을 추며 입에 뿜은 물이 성 선비의 목덜미를 적시던 바로 그 찰나였습니다.
“암행어사 출도야! 암행어사 출도요!”
벽력같은 고함과 함께 관아 담장을 넘어 수십 명의 역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혼비백산한 배 사또가 붓을 떨어뜨리며 일어서려는데, 옥색 비단 도포를 입은 젊은 어사가 당당하게 걸어 나왔습니다. 그의 손에는 번쩍이는 마패가 들려 있었지요. 배 사또는 다리를 바들바들 떨며 뜰 아래로 엎드렸습니다.
“어, 어사또 나리! 이 무슨 무례입니까! 지금 중죄인의 참수를 집행하는 중이온데!”
암행어사가 삿갓을 벗어 던지며 차가운 목소리로 꾸짖었습니다.
“네놈이 말하는 마적이 바로 나란 말이냐!”
그 얼굴을 본 성 선비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바로 그 비바람 치던 밤, 다리를 절며 밥을 얻어먹고 말을 빌려 타고 떠났던 과객, 이몽선이었습니다.
감추어진 진실
사실 이몽선은 단순한 과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삼남 지방의 탐관오리를 척결하라는 국왕의 밀명을 받고 비밀리에 잠행하던 암행어사였지요. 그러나 옥천에 이르러 배 사또가 보낸 자객들의 습격을 받아 수행원들과 흩어지고, 다리에 부상을 입은 채 쫓기던 중이었습니다. 그 급박한 상황에서 성 선비를 만났던 것이지요.
이몽선은 품속에서 성 선비가 건네주었던 붉은 나무패를 꺼내 높이 들어 올렸습니다.
“배극태, 네놈은 이 선비가 도적과 내통했다며 옥에 가두고 명마를 가로채려 했으나, 이 패를 보아라! 이 패는 선왕 시절 충신에게 내린 어사패의 모조품이자 성 선비 가문의 표식이다. 내가 이 패를 증거로 한양에 급보를 전하고 조정을 움직여 네놈의 온갖 가렴주구와 횡령 장부를 모조리 확보했다!”
게다가 관아 밖에서 힘찬 말울음소리가 들려오더니, 붉은 갈기를 휘날리며 적풍이 위풍당당하게 마당으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적풍은 꿇어앉은 성 선비에게 다가가 얼굴을 비비며 반가움의 숨을 몰아쉬었지요. 성 선비가 건넨 말 덕분에 이몽선은 자객들의 추격을 따돌리고 무사히 한양에 닿아 배 사또의 비리를 낱낱이 고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네놈의 죄는 백성들을 수탈하고, 무고한 선비를 모함하여 죽이려 한 대역죄다! 저 간악한 사또의 관복을 벗기고 당장 하옥하라!”
어사의 호통에 배극태는 낯빛이 흙빛이 되어 오줌을 지리며 끌려갔고, 백성들은 일제히 만세를 불렀습니다. 이몽선은 손수 성 선비의 결박을 풀고 깊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선비님의 말 한 필과 신의가 없었더라면, 제 목숨도 나랏일도 모두 끝장났을 것입니다. 내어주신 믿음 덕분에 온 고을의 어둠을 걷어낼 수 있었습니다.”
맺으며
성 선비는 빼앗겼던 가문의 명예를 되찾고, 이후 조정의 부름을 받아 고을의 어진 수령으로 천거되었답니다. 붉은 말 적풍은 늙어 죽을 때까지 주인의 곁을 지키며 온 동네의 사랑을 받았지요.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대가 없이 베푼 믿음은 결국 가장 큰 복이 되어 제 발로 돌아오는 법인가 봅니다.
혹여 여러분도 낯선 이에게 베푼 작은 친절이 뜻밖의 인연이 되어 돌아왔던 경험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깊은 밤, 죽은 아내의 무덤에서 들려오는 아기 울음소리의 비밀이 밝혀집니다.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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