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야담

똥물 구덩이에 멍석을 깐 선비와 장원급제한 시권의 비밀

지은미소 2026. 10. 19.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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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마당에 수천 명의 유생이 구름처럼 몰려들던 날, 시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둥둥 울리기도 전에 해괴한 싸움이 벌어졌더랍니다. 모두가 햇볕 잘 들고 시관의 눈에 잘 띄는 어도(御道) 근처를 차지하려고 웃옷을 찢어가며 몸싸움을 벌이는데, 한 젊은 선비는 코를 쥐어짜는 뒷간 옆 진흙탕에 홀로 멍석을 깔고 앉아 붓을 고르고 있었지요.

주변 유생들이 미친놈이라며 손가락질을 퍼붓고 침을 뱉었지만, 청년은 싱긋 웃을 뿐 미동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 뒷간 구석자리가 훗날 나라를 뒤흔들 대과(大科)의 장원을 낳을 기막힌 명당이 될 줄은 귀신도 몰랐던 일이었지요.

욕심 많은 세도가와 가난한 시골 선비

때는 숙종 대왕 시절, 충청도 청주목에 글재주는 빼어나나 가세가 기울어 찢어지게 가난한 조홍석이라는 선비가 살았습니다. 홍석은 성품이 곧고 관찰력이 남달라 바람결만 스쳐도 비가 올지 눈이 올지 알아맞힐 만큼 눈치가 비상했지요.

반면 한마을에 살던 세도가의 서자 배태칠은 돈과 권세만 믿고 남의 시문을 훔쳐 제 이름으로 내걸기 일쑤인 파렴치한 자였습니다. 태칠은 이번 한양 과거 시험에서 어떻게든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고자 온갖 모리배를 불러 모았더랍니다.

"홍석이 놈의 글솜씨를 이번에도 빌려야겠구나. 아니, 빌리는 게 아니라 아예 그놈의 시권을 통째로 가로채야지."

태칠은 제 하인들을 모아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은밀히 엽전 보따리를 건넸습니다. 홍석은 그런 음모도 모른 채 짚신 세 켤레를 봇짐에 묶고 한양 길에 올랐지요.

바람의 길과 햇빛의 그림자

한양에 도착한 홍석은 시험 전날 밤, 몰래 성균관 명륜당 앞마당을 샅샅이 둘러보았습니다. 초여름이었으나 유난히 남동쪽에서 습한 바람이 불어오고, 마당 한가운데 늘어선 고목나무의 잎사귀들이 유독 한쪽으로만 흔들리고 있었더랍니다.

"내일 정오가 지나면 하늘이 그냥 있지 않겠구나. 바람이 회오리를 치고 볕이 눈을 찌를 텐데, 저 넓은 마당 한복판은 무덤이나 다름없겠어."

홍석은 낮게 웅얼거리며 마당 구석, 담장 아래 악취가 풍기는 뒷간 옆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허물어진 담벼락 틈새로 맑은 북서풍이 솔솔 새어 나오고, 낡은 처마가 길게 뻗어 오후의 따가운 역광을 오롯이 가려줄 자리였지요.

다음 날 동이 트자마자 시험장 문이 열렸고, 배태칠은 힘센 장정 십여 명을 앞세워 시관의 좌석 바로 앞, 이른바 최고의 명당이라 불리는 마당 정중앙에 큼직한 차일을 쳤습니다.

"야, 조홍석! 촌놈아, 벼슬길 명당은 권세 있는 자의 몫이다. 너 같은 거지는 저기 뒷간 똥물이나 퍼먹으며 글을 짓거라!"

태칠이 비열하게 낄낄거리며 홍석을 떠밀었고, 홍석은 두말없이 허름한 멍석을 들고 악취가 진동하는 뒷간 구석 자리로 걸어갔더랍니다.

먹구름과 뒤바뀐 운명

시제가 걸리자마자 장내는 숨 막히는 침묵 속에 붓 굴리는 소리만 요란했습니다. 그러나 오시(午時)를 넘기자 홍석의 예상대로 하늘이 급변하기 시작했지요.

갑자기 마당 한가운데로 매서운 맞바람이 몰아치더니, 흙먼지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솟구쳐 유생들의 눈과 벼루를 덮쳤습니다. 태칠이 차지한 자리는 거센 흙바람을 정면으로 맞아 시권에 먹물이 튀고 종이가 찢겨나가는 아수라장이 되었더랍니다.

"아이고, 눈이야! 내 종이! 먹물이 다 번졌다!"

비명과 탄식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오직 홍석이 앉은 뒷간 구석자리만은 담벼락이 바람을 막아주고 처마가 햇빛을 가려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악취마저 북서풍에 날아가 버려 맑은 공기 속에서 홍석의 붓끝은 거침없이 종이 위를 내달렸지요.

다급해진 태칠은 제 글을 망치자, 하인들을 시켜 홍석의 뒤를 덮치게 했습니다.

"저놈의 완성된 시권을 빼앗아 내 낙관을 찍어라! 어서!"

태칠의 하인이 흙먼지를 틈타 홍석의 시권을 낚아채 달아났고, 홍석은 빼앗긴 시권을 보며 허탈하게 주저앉는 듯 보였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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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벼루에 찍힌 붉은 핏자국

태칠은 홍석에게서 가로챈 시권을 거만하게 들고 시관에게 일등으로 제출했습니다. 시험이 끝나고 시관들이 시권을 채점하는데, 태칠이 낸 시문이 단연 압도적이어서 시관들의 감탄이 쏟아졌지요.

"허허, 문장이 마치 용이 승천하는 듯하구나! 장원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이 시권이다!"

시관들이 붉은 먹으로 둥근 점을 치며 장원으로 올리려던 찰나, 홍석이 성균관 뜰 앞으로 뛰어나와 엎드리며 크게 외쳤습니다.

"사또 나으리! 억울하옵니다! 그 시권은 제가 쓴 것이며, 저기 앉은 배태칠 유생이 훔쳐간 장물입니다!"

태칠이 펄쩍 뛰며 소리를 질렀지요.

"네 이놈!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감히 어디서 발악이냐! 내 종이에 내 이름이 적혀 있거늘, 네가 무슨 수로 네 글이라 우기느냐!"

시관이 인상을 찌푸리며 홍석을 꾸짖었습니다.

"증거도 없이 조정을 능멸하면 엄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네 글이라는 증좌가 있느냐?"

홍석은 가슴속에서 먹 묻은 손수건을 꺼내 보이며 담담하게 답했더랍니다.

"시권의 오른쪽 여백, 칠언율시 세 번째 줄의 종이 결을 비추어 보십시오. 뒷간 옆 담벼락에서 스며든 석청(돌 틈의 벌꿀) 한 방울이 먹물에 섞여 은은한 단내가 날 것이며, 제 검지손가락을 바늘로 찔러 낸 피를 먹에 섞어 썼기에 촛불에 비추면 먹색 아래 붉은 핏빛이 감돌 것입니다."

대반전의 햇살

시관이 의아해하며 시권을 들어 촛불에 비추고 냄새를 맡아보았습니다. 과연 글자 주변에서 은은한 꿀 향이 번져 나왔고, '충(忠)' 자를 쓴 먹물 깊은 곳에서 선명한 핏빛이 붉게 타오르듯 비쳐 보였지요.

"이럴 수가! 종이결 깊숙이 혈흔이 박혀 있구나! 태칠아, 네 놈이 썼다면 손가락에 상처가 있어야 할 터, 손을 내밀어 보아라!"

태칠은 새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떨며 제 두 손을 뒤로 숨겼습니다. 태칠의 희고 깨끗한 열 손가락에는 바늘구멍 하나 없었던 반면, 홍석의 오른손 검지에는 방금 찌른 듯 마른 핏자국이 뚜렷했더랍니다.

"네 놈이 감히 신성한 과거장에서 남의 글을 도둑질하고 국법을 능멸하려 들다니!"

시관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나졸들이 달려들어 배태칠을 꿇어앉히고 곤장을 내리쳤습니다. 태칠은 영구히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당하고 머나먼 변방으로 귀양을 떠나는 신세가 되었지요.

홍석은 그 자리에서 당당히 장원 급제의 영예를 안았고, 바람의 길과 해의 위치를 헤아려 뒷간 옆 명당을 찾아냈던 그의 비범한 혜안은 삽시간에 한양 전체에 파다하게 퍼졌더랍니다.

맺으며

참된 명당이란 남들이 탐내는 화려한 자리가 아니라, 자연의 이치를 읽고 스스로를 낮추는 지혜 속에 숨어 있는 법이지요. 겉보기에 더러운 뒷간 구석도 혜안을 가진 자에게는 용문(龍門)이 되었으니, 참으로 사람의 앞날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답니다. 혹여 여러분도 남들이 다 피하는 궂은 자리에서 뜻밖의 큰 복을 건져 올린 기이한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한밤중 외딴 주막에서 썩은 간장을 퍼먹던 의문의 백발 노인과 사라진 금괴의 행방.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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