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묻은 배냇저고리와 절름발이 지게꾼이 품어 기른 감영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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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이십오 년, 눈보라가 살을 에는 섣달그믐 밤이었지요. 황해도 봉산 고을 어귀의 허물어져 가는 당산나무 밑에서 까무러치는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더랍니다.
지게를 내려놓고 다리를 절룩이며 다가선 총각은 눈밭에 파묻힌 붉은 비단 포대기를 발견했습니다. 사내아이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고, 아이의 작은 가슴팍에는 모란꽃이 금실로 수놓아진 배냇저고리가 피로 붉게 얼룩져 있었지요.
눈밭에 버려진 핏덩이

총각의 이름은 칠복이었습니다. 어릴 적 마차에 깔려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저는데다 가진 것 없는 품팔이 왈짜 신세였으나, 심성만큼은 산골 옹달샘처럼 맑은 위인이었지요.
그가 바라는 것은 그저 남에게 손벌리지 않고 제 힘으로 따스한 밥 한 술 떠먹는 소박한 삶뿐이었습니다. 칠복이는 얼어붙은 아이를 제 누더기 품속 맨살에 넣고 온몸을 떨며 섶집으로 달렸습니다.
"아가, 정신 차려라. 이 모진 눈밭에서 어찌 숨을 놓으려 하느냐."
제 살을 덥혀 아이를 살려냈지만, 문제는 젖이었습니다. 사내 혼자 몸으로 핏덩이를 무얼로 먹여 살린단 말입니까.
눈물로 얻어먹인 동냥젖

이튿날부터 칠복이는 아이를 앞섶에 동여매고 십 리 밖 장터와 여염집을 돌며 젖동냥을 시작했습니다.
"아주머니, 제발 이 어린것에게 젖 한 모금만 나눠 주십시오. 마당 쇠똥이라도 치워 드리고 장작도 하루 종일 패 드리겠습니다."
칠복이는 절룩이는 다리로 마을 아낙들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해주며 아이에게 젖을 물렸습니다. 때로는 모진 매질을 당하고 밥주걱으로 뺨을 맞아가면서도, 아이가 배를 채우고 방긋 웃을 때면 온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했지요.
그는 아이에게 바위처럼 단단하게 살아남으라는 뜻으로 '돌석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더랍니다. 돌석이는 무럭무럭 자라나 여덟 살이 되었고, 제 아비를 닮아 효심이 깊고 총명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부사 조익현의 잔인한 발톱

평화롭던 마을에 먹구름이 낀 것은 새로 부임한 봉산 부사 조익현 때문이었습니다. 조익현은 탐욕스럽고 잔인하기로 악명이 자자했으며, 백성들의 피고름을 짜내 제 배를 불리는 간교한 자였지요.
어느 날 관아 뒤뜰 공사를 위해 불려간 칠복이는 돌석이를 데리고 관아에 들어섰습니다. 그늘 밑에서 글공부를 흉내 내며 흙바닥에 글자를 쓰던 돌석이를 본 조익현의 눈빛이 퍼렇게 번뜩였습니다.
"네놈은 뉘 집 자식이냐? 당장 그 아이의 얼굴을 들어 보아라!"
조익현은 돌석이의 이마 오른편에 붉게 박힌 매화꽃 모양의 점을 보더니 사시나무 떨듯 손을 떨었습니다. 그러고는 칠복이를 노려보며 포졸들에게 서슬 퍼런 호통을 쳤지요.
"이 천한 절름발이 놈이 관가의 보물을 훔친 도적이다! 저놈을 하옥하고 저 어린 쥐새끼는 당장 깊은 우물에 처넣어라!"
영문도 모른 채 칠복이는 옥에 갇혔고, 모진 매질 아래 뼈가 부스러지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조익현의 목적은 죄를 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어린 돌석이를 소리 소문 없이 없애버리는 것이었지요.
어둠 속에서 드러난 피비린내

옥바라지를 돕던 착한 옥졸이 피투성이가 된 칠복이에게 은밀히 물을 먹이며 귀띔을 해주었습니다.
"칠복이 자네, 대체 저 아이를 어디서 주워 온 겐가? 사또가 아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사형수를 시켜 오늘 밤 우물에 던지라 명했네."
칠복이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는 품속 깊은 안감에 꿰매어 두었던 피 묻은 배냇저고리를 떨리는 손으로 뜯어냈습니다.
"나으리, 이 배냇저고리를 보십시오. 팔 년 전 눈밭에서 아이를 감싸고 있던 비단 옷입니다. 이 옷 안쪽에 붉은 실로 글자가 새겨져 있으나, 저는 까막눈이라 읽지 못했습니다."
옥졸이 달빛에 비추어 배냇저고리 깃 안쪽을 살피더니 사색이 되어 무릎을 꿇었습니다. 거기에는 '해서관찰사 이진평의 적자, 윤'이라는 글씨와 함께 관찰사의 직인이 선명히 찍혀 있었던 것입니다.
팔 년 전, 전임 황해도 관찰사 이진평 대감 일가가 한양으로 가던 중 산적을 만나 몰살당했다던 참극이 떠올랐습니다. 그 참극을 사주하고 관찰사의 자리를 가로채 승승장구했던 자가 바로 당시 판관이었던 조익현이었던 것이지요.
감영의 군관과 배냇저고리
옥졸은 목숨을 걸고 야밤에 성벽을 넘어 해서감영으로 내달렸습니다. 마침 감영에는 죽은 이진평 대감의 친우이자 조정에서 파견된 암행어사가 당도해 있었지요.
이튿날 아침, 조익현이 관아 뜰에서 비밀리에 돌석이를 결박하여 우물에 빠뜨리려던 찰나였습니다.
"사또 나으리! 그 아이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차라리 제 목을 베십시오!"
옥을 부수고 기어 나온 칠복이가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돌석이의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조익현이 칼을 빼어 들고 비열하게 웃으며 소리쳤지요.
"미천한 절름발이 놈이 감히 누구 앞이라고 주둥이를 놀리느냐! 내 손으로 네놈들의 숨통을 끊어버리겠다!"
칼날이 칠복이의 목을 내리치려던 순간, 우레 같은 함성과 함께 관아의 정문이 박살 났습니다.
"암행어사 출도야! 역적 조익현은 당장 포라를 받아라!"
어사와 함께 들이닥친 군관들이 칼을 쳐내고 조익현을 짓눌렀습니다. 어사는 눈밭에 내동댕이쳐진 배냇저고리를 집어 들고 피눈물을 흘리며 돌석이를 끌어안았습니다.
"진평 형님의 핏줄이 살아 있었구나! 이 금실 모란꽃과 관찰사의 사인은 결코 위조할 수 없는 증좌다!"
더럽혀진 탐욕의 파멸
조익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흙빛이 되었습니다. 팔 년 전 제가 베어 버렸던 상관의 어린 핏줄이, 제 발로 걸어와 숨통을 쥐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지요.
조익현의 비밀 곳간에서는 관찰사 일가를 도륙할 때 산적들에게 건넸던 밀서와 횡령한 장부들이 고스란히 쏟아져 나왔습니다. 대역죄가 명명백백히 드러난 조익현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의 형을 받았습니다.
돌석이는 본래의 이름인 이윤을 되찾고, 대대로 명망 높은 사대부가 문의 유일한 후계자로 복권되었습니다. 고을 백성들은 천벌이 내렸다며 소리 높여 환호했더랍니다.
맺으며
모든 원한이 풀린 뒤, 돌석이는 비단옷을 입고 가마를 타는 대신 칠복이의 낡은 지게를 메고 절뚝이는 양아버지의 손을 잡았습니다. 돌석이는 성인이 된 후 과거에 급제하여 아버지가 다스리던 황해도의 관찰사로 부임하였고, 칠복이를 친아버지의 예로 극진히 모시며 백년해로를 누렸지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절름발이 지게꾼의 눈물겨운 정성이 거악의 목을 베고 한 가문의 끊어진 맥을 다시 잇게 하였으니, 세상일이란 참으로 하늘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법입니다. 혹여 그대도 남의 자식을 제 살붙이보다 더 귀하게 품어 세상을 놀라게 한 의로운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다음 이야기 예고: 밤마다 무덤가에서 소복을 입고 은장도를 가는 벙어리 며느리의 기이한 비밀이 밝혀집니다.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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