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 문턱서 붓을 쥐고 살아 돌아와 벗의 흉계를 밝힌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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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운종가 어귀의 주막 평상 위, 방금 숨이 멎었던 젊은 선비의 입에서 허연 김 한 줄기가 뿜어져 나왔더랍니다. 차갑게 굳어가던 손가락이 꿈틀거리더니 곁에 팽개쳐져 있던 지필묵을 와락 거머쥐었지요.
"허억! 내 답안지… 내 시권(試券)을 어디로 빼돌렸느냐!"
선비가 번쩍 뜬 두 눈에는 핏발이 서려 있었고, 곁에서 곡성을 흉내 내던 동향 벗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해 굳어버렸습니다.
과거 길에 품은 칠 년의 한

선조 임금 시절, 충청도 충주 목에 살던 남궁현이라는 가난한 선비가 있었습니다. 총명하고 심성이 올곧아 고을 훈장조차 칭송을 아끼지 않던 수재였지요.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병환 깊은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이번 별시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었더랍니다.
남궁현에게는 서당 시절부터 둘도 없이 지내온 배성식이라는 동무가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형제처럼 굴었으나, 배성식의 가슴속에는 언제나 남궁현을 향한 지독한 시기심이 도사리고 있었지요. 부유한 집안 덕에 글공부는 넉넉히 했으나 재주가 모자라 매번 낙방을 거듭했기 때문입니다.
"남궁 형, 이번에는 우리 둘 다 한양 길에서 크게 이름을 날려 보세나."
배성식은 웃으며 말했지만, 품속에는 이미 남궁현의 재주를 훔치려는 검은 탐욕이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새벽 주막의 수상한 독차

별시를 치르기 하루 전날 밤, 두 사람은 숭례문 밖 허름한 주막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남궁현은 등불 아래서 밤새 붓을 놀려, 이번 시제(詩題)로 유력하게 거론되던 치국책을 완벽한 문장으로 다듬고 있었지요.
"이 사람아, 내일이 결전인데 눈을 좀 붙여야지. 내 피로를 씻어줄 귀한 약차를 한 잔 타 왔네."
배성식이 건넨 찻잔에는 은은한 계피 향이 돌았으나, 그 밑바닥에는 마시면 서서히 숨구멍이 막히는 비상(砒霜) 섞인 독초 즙이 녹아 있었습니다. 남궁현은 의심 한 점 없이 찻물을 들이켰고, 이내 가슴을 쥐어짜며 자리에 고꾸라졌더랍니다.
"성식아… 숨이… 가슴이 찢어질 듯 타는구나…."
"쯧쯧, 남궁 형. 자네의 명문장과 이번 과거의 영광은 이제 온전히 내 것일세. 저승길이나 편히 가게나."
배성식은 남궁현이 피를 토하며 숨을 멈추자, 그의 품을 뒤져 밤새 쓴 답안 초안을 챙겼습니다. 그리고는 남궁현의 허리춤에 늘 차고 있던 유품인 '은장식 먹'마저 제 주머니에 슬쩍 찔러 넣었지요.
염라대왕 앞의 호리병
남궁현의 넋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짙은 안개로 뒤덮인 황천길로 끌려갔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우뚝 솟은 염라전 앞이었고, 붉은 도포를 입은 염라대왕이 벽력같은 호통을 내리쳤지요.
"충주 유생 남궁현을 끌고 오너라! 너는 어찌하여 명부에 적힌 수명인 일흔셋을 채우지 못하고 스물넷에 이곳에 당도하였느냐!"
판관이 명부를 넘기며 황급히 아뢰었습니다.
"대왕마마, 이 자는 명을 다한 것이 아니옵고, 곁에 있던 자의 흉악한 독살로 목숨줄이 끊긴 것이옵니다."
염라대왕이 수염을 바르르 떨며 판관의 먹물 담긴 호리병을 가리켰습니다.
"천륜을 어기고 벗을 해쳐 과거를 도둑질하려는 간악한 놈이 있단 말이냐! 저 호리병에 담긴 것은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눈물로 빚은 저승 먹이니라. 이 먹을 쥐고 이승으로 달려가 네 억울함을 직접 밝히고, 네 명을 온전히 찾아오너라!"
남궁현이 저승 먹을 손에 쥐는 순간, 뒤통수를 후려치는 듯한 충격과 함께 눈앞이 새하얗게 번쩍였더랍니다.
시권에 번진 검은 피
다시 숨을 쉰 남궁현은 곧장 성균관 앞 과거 시험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배성식은 이미 남궁현의 초안을 달달 외워 과거 시험지에 일필휘지로 적어 내려가고 있었지요. 시관들이 그의 글을 보고 감탄하며 장원급제를 논하던 찰나였습니다.
"멈추시오! 그 글은 내 글이며, 그 손에 든 먹은 내 물건이오!"
남궁현이 과거장 뜰 안으로 난입하자 배성식은 사시나무 떨듯 떨며 소리쳤습니다.
"미친놈이 어디서 행패냐! 죽은 귀신이 살아오기라도 했단 말이냐!"
남궁현은 관원들 앞에서 저승에서 쥐고 온 먹을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시관 나으리, 저 자가 품고 있는 은장식 먹은 제 선친의 유품이옵니다. 제 먹에는 제 호인 '청허(淸虛)'가 새겨져 있고, 저 자가 시권에 쓴 먹물은 독초와 섞여 냄새가 역할 것입니다. 어디 제가 쥔 이 저승 먹으로 다시 글을 써 비교해 보시지요!"
포졸들이 배성식의 품을 뒤져 은장식 먹을 꺼내자, 밑동에 '청허' 두 글자가 선명히 드러났습니다. 게다가 배성식의 시험지에 촛불을 가까이 대자, 독초가 타들어 가는 고약한 악취가 시험장 가득 진동했지요. 배성식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사시나무 떨듯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더랍니다.
맺으며
배성식은 벗을 독살하려 하고 과거를 도둑질한 죄로 변방의 노비로 영구히 유배되었습니다. 반면 남궁현은 다시 치러진 시험에서 당당히 장원으로 급제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충주 목사로 금의환향했지요.
사람의 목숨과 재주는 억지로 빼앗을 수 있어도 하늘이 내린 운명과 진실은 저승의 문턱을 넘어서라도 제자리를 찾는 법이랍니다.
혹여 여러분도 억울하게 빼앗긴 것을 끝내 되찾아 기적처럼 일어선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깊은 밤, 홀로 남은 과부의 방문을 두드린 백골의 사내와 사라진 세공 패물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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