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어미를 업고 천리길을 걸어 과거장에 든 선비가 밝혀낸 흉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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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땅 성균관 앞 과거장에 해괴한 광경이 벌어졌더랍니다. 남루한 도포를 입은 젊은 선비가 허리가 굽은 늙은 여인을 등에 꽁꽁 동여맨 채 붓을 쥐고 앉아 있었지요.
"주상 전하께서 친히 납시어 시제를 내리시는 마당에, 어찌 시정잡배도 아니요 병든 노파를 등에 업고 들어왔단 말이냐!" 시관이 불호령을 내리며 포졸들을 불렀으나, 선비는 미동도 없이 먹을 갈 뿐이었습니다.
눈먼 어머니와 찢어진 봇짐

때는 숙종 대왕 시절, 전라도 남원 땅 외진 산골에 이진우라는 몰락 양반이 살고 있었습니다. 성품이 대쪽 같고 학문이 깊었으나, 가세가 기울어 짚신을 삼아 눈먼 홀어머니 조씨를 봉양하고 있었지요.
진우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과거에 급제하여 돌아가신 아비의 누명을 벗기고 눈먼 어미에게 따뜻한 흰쌀밥 한 그릇을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고을에는 권세를 믿고 백성을 쥐어짜던 향청의 좌수 배판석이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배판석은 진우의 학식이 높음을 시기하여, 과거 시험장에 아예 가지 못하도록 온갖 간계를 꾸몄더랍니다.
과거 보름 전, 배판석은 아랫것들을 시켜 진우의 낡은 초가삼간에 불을 질러 버렸습니다.
등 뒤의 무게, 천리 길의 피눈물

"어머니, 집이 다 탔습니다. 남은 것은 제 등에 짊어진 이 봇짐과 어머니뿐입니다."
잿더미 속에서 겨우 몸만 빠져나온 진우가 통곡하자, 눈먼 조씨 부인은 아들의 젖은 손을 가만히 쥐었지요.
"진우야, 어미 걱정은 말고 과거를 보러 가거라. 나는 동냥치 밥이라도 얻어먹으며 고을에 남아 있겠다."
"어찌 어머니를 이런 잿더미에 홀로 두고 간단 말입니까! 제가 천 리를 걸어서라도 어머니를 모시고 한양으로 갈 것입니다."
진우는 광목천을 찢어 어머니를 제 등에 단단히 묶었습니다. 그 길로 남원에서 한양까지 천리 길을 밤낮없이 걸었더랍니다. 짚신이 다 닳아 맨발에서 피가 터져 나왔고, 흙탕물이 버무려진 산길을 넘을 때마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지요.
등 뒤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품에서 바싹 마른 모싯잎 떡 한 덩이를 꺼내 아들의 입에 넣어 주었습니다.
"아가, 힘을 내거라. 이 떡은 네 아버지가 남겨 주신 마지막 쌀가루로 빚은 것이다."
주막집의 칼바람과 사라진 서책
한양을 코앞에 둔 충청도 삼거리 주막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밤, 진우가 곤히 잠든 틈을 타 수상쩍은 그림자가 방 안으로 숨어들었지요.
배판석 좌수가 미리 보낸 자객이 진우의 과거 응시 표식인 녹패와 과문 초안이 든 괴나리봇짐을 훔쳐 달아나려 한 것입니다.
기척을 느낀 진우가 벌떡 일어났으나, 괴한은 이미 봇짐을 들고 마당으로 뛰쳐나간 뒤였습니다.
"도둑이야! 게 섰거라!"
진우가 소리치며 뒤쫓으려 하자, 눈먼 조씨 부인이 다급하게 외쳤습니다.
"진우야, 쫓아가지 마라! 그 자의 옷자락에서 나던 냄새를 맡았다. 썩은 유황 냄새와 피비린내…… 배판석 그자의 사당에서 피우던 향초 냄새다!"
날이 밝아 확인해 보니, 봇짐은 사라졌으나 괴한이 떨어뜨리고 간 붉은 칠을 한 패쪽 하나가 마당 구석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배판석 가문의 사병들이 차고 다니는 '수(洙)' 자가 새겨진 신표였지요.
어탑 앞의 고변과 먹물 묻은 치마
천신만고 끝에 한양 과거장에 당도한 진우는 봇짐도 없이, 눈먼 어머니를 업은 채 시험장에 들어섰습니다.
소란을 듣고 어좌에서 지켜보던 숙종 대왕이 진우를 앞으로 불러 세웠더랍니다.
"선비의 도리를 아는 자가 어찌 과거장에 어미를 업고 들어와 어지럽히느냐? 까닭을 고하지 못하면 참형에 처할 것이다!"
임금의 추상같은 호령에 진우는 엎드려 통곡하며 등 뒤의 배판석의 신표를 바쳤습니다.
"상감마마, 소신의 어미는 눈이 멀어 잠시도 곁을 비울 수 없고, 고을의 간악한 무리가 소신의 집을 태우고 길을 막아 어미를 지키며 여기까지 왔나이다!"
그때, 진우의 등 뒤에 묶여 있던 조씨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아뢰었습니다.
"전하, 소경인 제가 비록 앞은 못 보오나, 저 남원 땅 좌수 배판석이 관곡을 빼돌리고 무고한 백성을 죽인 장부를 이 늙은이의 치맛자락 속에 숨겨 왔사옵니다."
조씨 부인은 낡아 헤어진 속치마 안단을 뜯어냈습니다. 그 안에는 십 년 전, 배판석의 모함으로 옥사한 진우 아비가 목숨과 맞바꾸며 남긴 피 묻은 밀지 원본이 꿰매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진실의 탄로와 어사의 행차
과거장에 모인 만조백관과 유생들이 술렁였습니다. 숙종 대왕은 낡은 치맛자락 속의 문서를 받아 들고는 얼굴을 붉히며 용상을 내리쳤지요.
"이것은 십 년 전 억울하게 죽은 충신의 상소문이 아니더냐! 과인이 우매하여 충신의 혈육을 천리 길 피눈물 속에 버려두었구나!"
임금은 그 자리에서 진우의 글재주를 시험하였고, 진우는 눈먼 어머니의 어깨를 짚은 채 단숨에 백성을 구휼할 방책을 일필휘지로 써 내려갔습니다.
"장원 급제로다!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이 귀신을 감동시키니, 이 어찌 하늘이 내린 인재가 아니겠는가!"
숙종은 진우에게 장원 급제의 영예인 어사화를 내리고, 남원 땅으로 내려갈 암행어사의 마패를 함께 하사하였습니다.
배판석은 과거장에서 승전보를 기다리다, 어사 출도를 외치며 들이닥친 진우와 포졸들을 보고 혼비백산하여 마당에 무릎을 꿇었더랍니다.
맺으며
배판석의 모든 재산은 몰수되어 불탄 집들을 다시 짓는 데 쓰였고, 효자 선비 이진우는 눈먼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며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명관이 되었지요. 지극한 효심과 꺾이지 않는 절개는 천리 길 가시밭도 비단길로 바꾸는 법이랍니다.
혹여 여러분도 부모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천지신명을 감동하게 한 옛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밤마다 무덤가에서 은비녀를 파내어 국밥을 사 먹던 수상한 과부의 정체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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