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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진 문전옥답을 빼앗은 양반이 피눈물로 읽어 내린 기막힌 유언장

지은미소 2026. 10. 17.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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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시절, 전라도 남원 고을에는 비가 내리지 않아도 곡식이 절로 쑥쑥 자란다는 기름진 땅 스무 마지기가 있었더랍니다.

피땀 흘려 돌밭을 일구었던 늙은 소작농 박 서방이 피를 토하며 숨을 거두던 날, 마을 사람들은 통곡 소리 대신 기와집에서 흘러나오는 서늘한 웃음소리를 들어야 했지요.

욕심 많은 양반의 마수

남원부의 토호 배 진사는 동네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구두쇠이자 탐욕스러운 양반이었습니다. 그는 박 서방이 뼈 빠지게 가꾼 기름진 옥답을 늘 탐내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요.

"박 서방, 네놈이 지난 흉년에 빌려 간 쌀 서른 섬에 붙은 이자가 벌써 백 섬을 훌쩍 넘겼다. 당장 갚지 못하면 저 아래쪽 들판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배 진사는 낡은 차용증을 흔들며 박 서방을 옥죄었습니다.

하지만 박 서방은 결코 게으른 농투사니가 아니었지요. 그는 억척같이 농사를 지어 가마니를 채웠으나, 배 진사는 쌀에 모래를 섞었다느니 날짜를 넘겼다느니 억지를 부리며 빚을 눈덩이처럼 불렸던 것입니다.

"나으리,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 땅마저 빼앗기면 병든 자식 놈과 어찌 입에 풀칠을 한단 말입니까?"

박 서방이 마당에 엎드려 이마가 깨지도록 빌었지만, 배 진사는 비단신으로 노인의 손등을근 짓밟을 뿐이었습니다.

피 묻은 도장과 남겨진 함

결국 화병과 과로를 이기지 못한 박 서방은 시름시름 앓다가 눈을 감기 직전의 지경에 이르렀더랍니다.

배 진사는 숨이 꼴깍 넘어가는 노인의 방으로 하인들을 이끌고 들이닥쳤지요.

"차용증에 손가락 도장만 찍으면 그만이다. 곱게 눈을 감게 해 주마."

배 진사는 의식이 희미한 박 서방의 엄지손가락을 억지로 잡아끌어 백지에 붉은 인주를 묻혀 찍어 버렸습니다.

문전옥답의 소유권이 허망하게 배 진사의 손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지요. 박 서방은 눈을 부릅뜬 채 배 진사의 얼굴을 노려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욕심에 눈이 먼 자는… 반드시 제 꾀에… 걸려 넘어지는 법이오…"

박 서방은 품속에서 낡은 오동나무 함 하나를 꺼내어 곁에 있던 아들 칠복이에게 건넨 뒤 그대로 숨을 거두었더랍니다.

배 진사는 코웃음을 치며 문서를 챙겨 집으로 의기양양하게 돌아갔지요.

관아로 날아든 뜻밖의 소환장

땅을 독차지한 배 진사는 며칠 밤낮을 흥청망청 잔치를 벌이며 기세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박 서방의 장례가 끝난 지 사흘째 되던 날, 남원 관아의 포졸들이 배 진사의 사랑채로 들이닥쳤지요.

"배 진사는 지금 당장 사또의 명을 받들어 동헌으로 출두하시오!"

영문을 모른 채 나졸들에게 이끌려 동헌 마당에 선 배 진사는 이맛살을 찌푸렸습니다.

"감히 양반인 나를 이따위로 대하다니, 사또가 제정신이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러는 게요!"

호통을 치는 배 진사 앞에, 남원부사 이형관이 싸늘한 표정으로 서류 한 장을 내려다보며 앉아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상복을 입은 박 서방의 아들 칠복이가 피눈물을 흘리며 엎드려 있었고, 그 앞에는 박 서방이 숨을 거두며 남겼다는 낡은 오동나무 함이 놓여 있었지요.

드러난 유언장의 서늘한 진실

사또 이형관이 헛기침을 크게 하더니 목소리를 높여 말했습니다.

"배 진사, 네놈이 박 서방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 억지로 지장을 찍게 하여 땅을 빼앗았다는 고변이 들어왔다. 그뿐 아니라 여기, 박 서방이 남긴 유언장과 증서가 있다!"

배 진사는 콧방귀를 뀌며 품속에서 자신이 챙겨둔 양도 문서를 꺼내 보였습니다.

"터무니없는 모함입니다! 여기 박 서방이 제 빚을 갚기 위해 온전히 제게 땅을 넘기겠다고 직접 찍은 지장이 찍힌 문서가 버젓이 있질 않습니까!"

그러자 사또는 오동나무 함에서 한양 예조(禮曹)의 붉은 관인이 찍힌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펼쳤더랍니다.

"네놈이 빼앗은 그 땅이 과연 누구의 땅인지 알고나 있느냐? 이 땅은 십 년 전 왜변 때 공을 세워 전사한 박 서방의 큰형에게 나라에서 내린 '사패지(賜牌地)', 즉 면세와 양도가 엄격히 금지된 공신전이다!"

배 진사의 얼굴이 일순간 흙빛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또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마당을 쨍쨍 울렸지요.

"나라의 허락 없이 사패지를 사고파는 자는 역모에 준하는 엄벌에 처하며, 그 거래 문서를 작성한 자는 장형 백 대에 재산을 몰수하고 변방으로 귀양을 보낸다는 국법이 적혀 있다. 게다가 박 서방이 유언으로 남긴 진짜 문서를 보아라!"

박 서방의 유언장에는 생전에 배 진사가 강제로 위조 문서를 만들 것을 미리 내다보고 남긴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내가 숨을 거둘 때 배 진사가 강제로 내 지장을 찍어 갈 터이니, 그 문서에 찍힌 내 지장이 바로 배 진사가 국법을 어기고 나라의 공신전을 강탈하려 했다는 결정적인 증좌가 될 것이다.'

박 서방의 손가락 지장이 배 진사를 옥죄는 가장 무서운 덫이었던 셈이지요.

맺으며

억지를 부려 남의 피땀 어린 땅을 가로채려던 배 진사는 제 손으로 들고 온 문서가 족쇄가 되어, 온 가산을 몰수당하고 함경도 삼수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더랍니다.

반면에 억울함을 푼 칠복이는 나라로부터 온전히 공신전을 인정받아 어머니와 함께 평화롭게 농사를 지으며 살 수 있었지요.

탐욕에 눈이 멀면 눈앞의 황금 뒤에 도사린 시퍼런 칼날을 보지 못하는 법이니, 사람이 어찌 분수에 넘치는 남의 것을 함부로 탐내겠습니까.

여러분도 혹시 꾀를 부려 남을 속이려다 도리어 제 덫에 걸려 넘어진 기막힌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깊은 밤, 벼락 맞은 고목나무 밑에서 솟아난 은항아리의 오싹한 비밀이 펼쳐집니다.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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