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계 관아의 차가운 옥을 녹인 늙은 시객의 시조 한 수와 비밀 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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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람이 살을 에는 북방 강계 땅의 겨울밤, 관아의 작은 별당에는 살얼음 같은 침묵이 흐르고 있었더랍니다. 숯불 화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이는 백발이 성성한 유배객과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을 한 관기였지요.
얼어붙은 북녘 땅의 은밀한 밀명

선조 임금 시절,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평안도 강계 땅으로 쫓겨온 송강 정철은 그저 낡은 붓과 술병에 기대어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시와 풍류로 천하를 울렸던 대문장이었으나, 거친 북변의 삭풍 앞에서는 그저 초라한 늙은이에 불과했지요.
그런 그가 머무는 처소에 어느 날 밤, 관아에서 가장 빼어나다는 기생 진옥이 홀로 찾아왔습니다. 옥처럼 맑고 차가운 자태를 지닌 진옥은 술잔을 채우면서도 단 한 번 미소를 짓지 않았지요. 진옥이 바라는 것은 풍류가 아니라, 바로 살아남는 것이었습니다.
강계 부사 배판호는 탐욕스럽고 잔인한 사내였습니다. 그는 조정의 거물이었던 송강이 유배지에서 몰래 반역의 서신을 쓰는지 감시하라며, 진옥의 병든 아우를 인질로 잡고 그녀를 보낸 것이었지요.
"송강의 필적이 담긴 밀서를 찾아오너라. 만약 실패하면 네 놈의 아우는 삭주 광산으로 끌려가 생을 마감할 것이다."
배판호의 서슬 퍼런 협박이 진옥의 귓가를 맴돌고 있었습니다. 진옥은 정철이 취해 곯아떨어지기만을 차갑게 기다렸더랍니다.
옥과 쇠가 부딪치는 소리

그러나 정철은 술잔을 매만질 뿐, 칼끝 같은 여인의 속내를 꿰뚫어 본 듯 빙그레 웃을 뿐이었습니다.
"이 거칠고 시린 변방에 어찌 이리 눈부신 옥이 굴러들어 왔는고?"
정철이 껄껄 웃으며 붓을 들어 화선지에 먹을 듬뿍 묻혔습니다. 그리고는 낭랑한 목소리로 시조 한 수를 읊어 내려갔지요.
"옥이 옥이라 하거늘 흙 속의 옥인 줄 알았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정말로 티 없는 참옥이로구나.
내게 쇠를 뚫는 송곳이 있으니 옥을 뚫어 볼까 하노라."
자신을 '옥(玉)'에 빗대고, 사내의 기개를 '쇠송곳'에 비유하여 희롱하는 듯한 시였습니다. 보통의 기녀라면 얼굴을 붉히거나 교태를 부렸을 테지만, 진옥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눈가에 서늘한 기운을 번뜩이며 되받아쳤지요.
"대감의 명성은 익히 들었으나, 소첩을 그저 쉬운 노리개로 보셨나이까?"
진옥은 정철의 손에서 붓을 낚아채듯 받아들고는 거침없이 먹을 갈아 화답 시조를 써 내려갔습니다.
"사람들이 쇠라 하거늘 나는 정말 쇠인 줄 알았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녹슨 헌 쇠로구나.
내게 돌을 가는 숫돌이 있으니 갈아 볼까 하노라."
시퍼렇게 날이 선 응수에 정철은 무릎을 탁 치며 파안대소했더랍니다.
"하하하! 참으로 매섭고도 기특하구나! 네 마음의 숫돌이 참으로 단단하도다. 허나 아가씨야, 숫돌이 아무리 단단한들 억울하게 흐르는 피눈물까지 갈아낼 수는 없는 법이지."
정철의 그 한마디에 진옥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늙은 정객은 이미 그녀의 소매 속에 숨겨진 고통을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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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아래 드러난 비밀 장부

"대감, 어찌 소첩의 속을 아시는 듯 말씀하시옵니까?"
진옥의 목소리가 잘게 흔들리자, 정철은 낡은 궤짝에서 붉은 비단으로 싼 종이 뭉치를 꺼내놓았습니다.
"배 부사가 너를 보낸 까닭을 내 모를 줄 알았더냐. 그자는 내가 역모를 꾀한다는 거짓 고변을 올려 공을 세우려 하지. 허나 진옥아, 네가 오늘 밤 찾아야 할 것은 나의 밀서가 아니라 바로 이것이니라."
정철이 펼쳐 보인 것은 뜻밖에도 배판호가 지난 삼 년간 군량미 수천 석을 빼돌려 한양의 권세가들에게 뇌물로 바친 '비밀 치부책'이었습니다. 강계로 귀양 올 때 충직한 옛 부하가 목숨을 걸고 전해 준 증거였지요.
"배 부사는 네 아우를 살려둘 생각이 추호도 없다. 증거를 없애려 너와 네 아우를 모두 변방의 깊은 구덩이에 묻을 작정이지. 보아라, 이 장부 맨 뒷장에 적힌 곡식 창고지기가 바로 네 아비의 이름이 아니더냐?"
진옥은 사시나무 떨듯 떨며 장부를 확인했습니다. 몇 해 전 억울하게 횡령 누명을 쓰고 옥사한 아비의 원통한 사연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던 것입니다. 배판호의 짓이었습니다. 진옥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려 먹물이 마르지 않은 시조 종이 위로 뚝뚝 떨어졌지요.
"소첩이… 소첩이 어리석어 원수의 손아귀에서 춤을 추고 있었군요."
"울지 마라. 쇠는 갈수록 날카로워지고, 옥은 깎일수록 빛을 발하는 법이다. 이제 저 간악한 승냥이를 잡을 덫을 놓아야지."
눈밭에 새겨진 함정과 응징
다음 날 새벽, 진옥은 배판호의 관아 집무실로 은밀히 숨어들었습니다. 그녀의 품에는 송강의 친필 서신이 담긴 밀통이 들어 있었지요. 배판호는 탐욕에 번들거리는 눈으로 밀통을 낚아챘습니다.
"크하하! 송강 놈이 결국 유배지에서 조정을 원망하는 시를 썼단 말이지? 이것만 한양으로 보내면 나는 당상관으로 영전할 것이다!"
배판호가 의기양양하게 밀통을 열어젖힌 바로 그 순간, 관아의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암행어사의 마패를 든 금군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강계 부사 배판호는 어명을 받들라!"
배판호가 경악하여 손에 든 종이를 내려다보았을 때, 거기 적힌 것은 정철의 반역시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진옥과 정철이 밤새 먹으로 베껴 쓴 배판호의 군량미 횡령 장부의 요약본이었지요. 정철이 미리 한양의 암행어사에게 비밀 장부의 사본을 보내 관아를 덮치도록 날짜를 맞추어 두었던 것입니다.
"네 이놈! 관기를 핍박하여 무고한 이를 모함하려 하고, 나라의 곡식을 도적질해 사리사욕을 채웠으니 그 죄를 능지처참으로 다스릴 것이다!"
배판호는 새파랗게 질려 변명조차 하지 못하고 포졸들에게 결박당해 눈밭으로 끌려 나갔더랍니다. 진옥의 억울하게 갇혀 있던 아우 역시 무사히 풀려나 누이의 품에 안겨 오열했습니다.
맺으며
시린 삭풍이 몰아치던 변방의 작은 방에서 오간 두 편의 시조는, 한 여인의 얼어붙은 한을 녹이고 간악한 탐관오리를 베어 넘긴 날카로운 칼날이 되었지요. 풍류란 그저 술과 여인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알아보고 어둠 속에서 길을 열어 주는 것임을 보여 준 하룻밤이었더랍니다.
혹여 여러분도 말 한마디, 글 한 줄로 얼어붙은 사람의 마음을 녹여 내거나 뜻밖의 위기를 벗어났던 신기한 이야기를 알고 계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한밤중 외딴 주막에 나타나 피 묻은 동전을 던져놓고 사라진 의문의 벙어리 검객 이야기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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