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감마님의 담을 넘은 밤도둑이 포도청 군관의 멱살을 잡은 까닭

▶ 영상으로 먼저 만나 보세요
선조 임금 시절, 한양 남산 밑 백사(白沙) 이항복 대감의 사랑채 지붕 위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살금살금 기어들었더랍니다.
스산한 초겨울 바람이 문풍지를 흔들던 야심한 밤, 창호지 문틈으로 칼날 같은 비수가 쑥 들어와 문고리를 비틀어 열었지요.
서까래 밑에 숨어든 칼잡이

방 안에는 기름등잔 하나가 가물거리고 있었고, 백사 대감은 벼루에 먹을 갈며 책장을 넘기던 중이었습니다. 문이 스르륵 열리자 복면을 쓴 건장한 사내가 방 안으로 불쑥 뛰어들었지요. 번쩍이는 칼날이 백사의 목덜미 턱밑까지 바짝 다가섰습니다.
"소리치면 목숨은 없다. 집안의 패물과 은자(銀子)를 몽땅 내놓아라!"
그 도둑의 이름은 최달식이라 하였는데, 본래 관군의 힘센 마부였으나 억울하게 쫓겨나 어두운 뒷골목을 떠돌며 칼잡이 노릇을 하던 자였지요. 백사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천천히 붓을 내려놓았습니다.
"밤바람이 몹시 찬데, 손님이 칼부터 들이미는구려. 재물을 원한다면 저기 반닫이 둘째 서랍을 열어보시오."
달식이 어리둥절하여 칼을 쥔 채 서랍을 뒤적거리자, 묵직한 백은 닷 냥과 작은 가죽 주머니가 손에 잡혔습니다.
술잔에 담긴 온기와 약속

"이보시오, 객손. 재물은 가져가되 내 방에 술과 마른 안주가 좀 남았으니 한잔 걸치고 몸이나 녹이고 가시게."
백사가 빙그레 웃으며 온기 남은 술병을 기울여 잔을 채워 주었습니다. 달식은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지만, 대감의 온화한 눈빛에 짓눌려 얼떨결에 잔을 받아 꿀꺽 삼켰지요.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독주에 달식의 거친 숨결이 잦아들었습니다.
"내 자네 손을 보니 칼을 쥐고 사람을 벨 손이 아니라, 나라의 말을 몰던 굳센 장사의 손이로군. 어찌 이리 천한 길로 들어섰는가?"
"먹고살 길이 막혀 굶어 죽어가는 노모와 어린 누이가 있습니다. 도둑질이 아니면 내일 당장 거리에 나앉게 생겼소!"
달식의 목소리에 설움이 왈칵 묻어났습니다. 백사는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털배자를 벗어 달식의 어깨에 둘러주었지요.
"이 배자는 따뜻하니 가져가 노모를 덮어드리게. 그리고 그 주머니 안에는 내 호패와 관인이 찍힌 글월이 들어있네. 오늘은 그 돈으로 끼니를 잇되, 사흘 뒤 대낮에 당당히 내 집 대문을 두드리게. 내 자네에게 사람답게 살 길을 열어주겠네."
달식은 믿기지 않는 마음에 털배자를 움켜쥐고 뒤뜰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달아났더랍니다.
▶ 이 이야기를 영상으로도 만나 보세요
포도청에서 날아든 살인 누명

사흘 뒤, 달식은 은혜를 갚고자 이항복의 집으로 향하던 중 우포도청 군관들에게 덜컥 덜미를 잡히고 말았습니다.
"네놈이 어젯밤 마포나루의 상단을 털고 상인 둘을 찔러 죽인 흉적이렷다!"
포도청 군관 배만호는 달식의 뺨을 후려치며 오랏줄로 꽁꽁 묶었습니다. 배만호는 평소 뇌물을 받아 챙기며 실적을 올리려고 애꿎은 부랑자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로 악명 높은 자였지요.
"나는 어젯밤 병든 노모의 곁을 지켰소! 사람을 죽인 적이 없단 말이오!"
"시끄럽다! 네놈 행색을 보아하니 딱 강도 놈이로구나. 어서 옥에 처넣어라!"
달식은 억울함에 피를 토하듯 소리쳤으나, 포졸들의 몽둥이질에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그가 차고 있던 털배자 속 품에서 엽전 몇 닢과 함께 하얀 가죽 주머니가 땅바닥으로 툭 떨어졌지요.
드러난 인장과 멱살 잡힌 군관

군관 배만호가 욕심을 부리며 그 주머니를 주워 열어보았을 때였습니다. 주머니 속에서 나온 것은 백사 이항복의 관인이 선명하게 찍힌 서찰과 그의 사적인 호패였지요. 배만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이, 이게 어찌하여 네놈 손에 있느냐? 대감마님의 물건을 훔친 게 분명하구나!"
배만호가 증거를 없애려 서찰을 찢으려던 바로 그 순간, 등 뒤에서 서늘한 호통이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떨어졌더랍니다.
"멈추어라! 감히 조정의 관리가 남의 징표를 훼손하려 드는가!"
마포나루 순시를 마치고 돌아오던 이항복 대감이 관복을 떨치며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습니다. 백사의 서슬 퍼런 기세에 포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지요. 달식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습니다.
"대감마님! 맹세코 저는 어젯밤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백사는 포도청 군관 배만호 앞으로 다가서서 땅에 떨어진 서찰을 가리켰습니다.
"배 군관, 그 서찰을 똑똑히 읽어보아라. '이 주머니를 지닌 자는 본관의 명을 받고 은밀히 마포나루 도적 떼의 소굴을 정탐하던 심복이니라'라고 적혀 있지 않더냐?"
배만호는 사시나무 떨듯 떨며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백사가 사흘 전 밤, 달식에게 주었던 가죽 주머니 속 글월은 단순한 추천장이 아니라 그를 자신의 은밀한 부하로 보증한다는 명분이 담긴 글이었던 것이지요.
백사는 달식의 결박을 손수 풀어주며 칼을 쥐여주었습니다.
"달식아, 네 결백은 내가 증명할 터이니, 네게 거짓 누명을 씌워 공을 탐하려 한 저 탐욕스러운 자의 멱살을 잡고 당장 죄를 물어라!"
달식은 눈을 부릅뜨고 달려들어 배만호의 멱살을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사시나무 떨듯 사죄하는 배만호의 추태에 포도청 마당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지요.
맺으며
이후 백사 대감은 군관 배만호의 비리를 낱낱이 밝혀 멀리 귀양을 보냈고, 목숨과 명예를 구원받은 최달식은 대감의 그림자 같은 호위무사가 되어 평생토록 충성을 다했더랍니다.
칼날을 품고 담을 넘었던 도둑을 따스한 술 한잔과 신뢰로 품어 가장 든든한 방패로 삼았으니, 사람의 마음을 얻는 지혜란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벼랑 끝에 몰린 이를 따뜻한 눈길 하나로 감싸 안아 평생의 벗으로 만든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한밤중 공동묘지에서 피 묻은 엽전 꾸러미를 파내던 어느 양반댁 규수의 기괴한 사연이 펼쳐집니다.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 이 이야기를 영상으로도 만나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