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밖 빗속에서 곡하던 처녀 귀신과 비단 장수가 품고 달아난 붉은 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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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대비 사이로 묘한 곡소리가 도성 서쪽을 흔들었더랍니다. 눅눅한 흙먼지가 피비린내와 뒤섞여 올라오던 영조 28년 유월의 그믐밤, 굳게 닫힌 돈의문 밖 돌담 아래에는 젖은 소복을 입은 여인의 그림자가 어김없이 어른거렸지요.
그 길목을 지나는 길손마다 헛것을 보았다며 사지가 뒤틀려 쓰러지기 일쑤였는데, 귀신을 마주한 자들의 입에선 한결같이 "붉은 댕기를 쥔 손이 목을 조른다"는 비명만 터져 나왔습니다.
서대문 밖 주막의 수상한 손님들

한양포도청의 참모포교 배도현은 무뚝뚝하지만 억울한 사정을 보면 제 밥상도 엎고 나서는 대쪽 같은 성품이었지요.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도성 백성들이 억울한 누명 없이 다리 뻗고 자는 평온한 세상뿐이었습니다. 빗줄기가 처마를 뚫을 듯 떨어지던 날, 도현은 연일 흉흉한 소문이 도는 서대문 밖 모화관 근처 허름한 주막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주막 구석에는 낯빛이 누렇게 뜬 중년의 사내가 술병을 덜덜 떨며 비우고 있었더랍니다. 도성 안에서 꽤나 큰 포목점을 운영하는 배부른 비단 장수 손창식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번드르르한 비단 도포를 둘렀으나 눈동자는 무언가에 쫓기듯 사방을 연신 두리번거렸지요.
"주모, 술이나 더 가져오너라! 빗소리가 이리 요란하니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절로 귓가를 때리는구나."
손창식이 젓가락을 탁 내던지며 헛기침을 뱉자, 비를 털어내며 들어선 도현이 그의 맞은편에 털썩 걸터앉았습니다.
"손 행수, 날도 궂은데 어찌 사대문 밖까지 나와 혼자 술을 푸시오? 요새 이 근방에 처녀 귀신이 출몰한다 하여 장정들도 해만 지면 발길을 끊는 터인데."
빗속을 가르는 피 맺힌 목소리

손창식은 도현의 포교 패를 힐끗 보더니 질린 얼굴로 손을 내저었더랍니다.
"포교 나리, 그깟 헛소문에 신경 쓸 게 무에요? 가난에 찌들어 목을 맨 계집의 넋두리일 뿐이라지 않소."
"목을 맸다? 손 행수는 그 원혼이 어찌 죽었는지 아는 모양이지요?"
도현의 날카로운 물음에 손창식이 흠칫하며 말문이 막힌 바로 그 찰나였습니다. 쏴아아 쏟아지던 빗소리를 뚫고, 주막 흙벽 너머에서 뼈를 에는 듯한 흐느낌이 들려왔지요.
"내 비단 치마… 내 혼수 비단… 네놈이 어찌 내 목을 감아 쥐고 옥반지를 빼앗아 갔더냐…"
어둑한 빗속에서 나타난 것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창백한 처녀였습니다. 소복 자락은 진흙과 핏물에 젖어 엉망이었고, 가녀린 손에는 찢겨진 비단 댕기 한 줄이 매달려 있었지요.
"으악! 저, 저것이 또 왔다! 포교 나리, 저 요물을 베어 주시오!"
손창식은 게거품을 물며 도현의 등 뒤로 숨었고,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붉은 비단 주머니를 바닥에 툭 떨어뜨렸습니다.
깨어진 옥반지와 뒤엉킨 원한
도현은 허리춤의 환도를 뽑아 들고 성큼 밖으로 나섰더랍니다. 비를 맞으며 허공을 응시하는 여인의 얼굴을 본 도현의 눈이 크게 흔들렸지요. 서대문 밖에서 가난하게 침선 일을 하던 열아홉 순박한 처녀, 연화의 얼굴이 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연화는 가난한 집안을 일으키려 손창식의 포목전에 바느질감과 귀한 옥반지를 맡기고 품삯을 받기로 되어 있었던 아이였습니다.
"연화야, 네가 정녕 원혼이 되어 구천을 헤매는 것이냐? 억울한 사정이 있거든 이 배도현에게 낱낱이 고하거라!"
도현이 칼집을 내리찍으며 외치자, 소복을 입은 형체는 핏발 선 눈으로 주막 문틈을 노려보며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리, 저자가 제 혼수로 남겨둔 어머니의 유품인 옥반지를 탐내어 저를 능욕하려 하였습니다. 제가 반항하자 저 비단 댕기로 제 목을 졸라 성벽 구석에 파묻었지요. 제 혼이 어찌 저승으로 가겠습니까!"
손창식은 사시나무 떨듯 떨며 문갑 뒤로 기어들어 갔지요.
"아니다! 낭설이다! 저년은 저 혼자 돈을 훔쳐 달아나다 벼랑에서 미끄러져 죽은 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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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탕 속에서 드러난 숨은 곡절
도현은 흙바닥에 떨어진 손창식의 붉은 비단 주머니를 집어 들었더랍니다. 주머니를 풀어헤치자 그 안에서 피 묻은 은가락지와 반으로 쪼개진 푸른 옥반지가 굴러떨어졌지요. 그 옥반지는 석 달 전 연화의 늙은 아비가 딸의 실종을 호소하며 도현에게 보여주었던 가문의 문양이 또렷이 새겨진 패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처녀 귀신의 발밑을 살피던 도현의 눈에 기이한 광경이 들어왔습니다. 귀신이라기엔 땅 위에 짙은 짚신 자국이 패어 있었고, 빗물에 젖은 진흙 위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요.
도현은 번개처럼 몸을 날려 소복 입은 여인의 손목을 낚아챘더랍니다. 차가운 귀신의 손이 아니라, 거칠고 따뜻한 온기가 도는 사람의 손목이었지요.
"너는… 귀신이 아니구나! 대체 뉘덕에 죽은 연화의 넋을 흉내 내는 것이냐?"
여인이 비명을 지르며 젖은 머리칼을 걷어 올리자, 도현은 숨을 들이켰습니다. 귀신 분장을 한 이는 연화의 쌍둥이 여동생인 설화였더랍니다.
"그래요, 나리! 귀신이라도 되지 않으면 그 누구도 힘없는 백성의 억울함을 들어주지 않으니까요! 관아에서는 언니가 돈을 훔쳐 도망쳤다는 저놈의 거짓말만 믿고 수사를 덮어버렸지 않습니까!"
설화는 품속에서 언니의 시신을 서대문 성벽 밑에서 직접 파냈을 때 나온 손창식의 비단 옷고름을 꺼내 보였습니다. 그 옷고름은 손창식이 평소 즐겨 입던 최고급 당비단과 정확히 일치했지요.
서대문 바닥에 벼락처럼 떨어진 심판
도현이 그 증거를 들이밀며 돌아보자, 손창식은 도망치려 뒷문으로 내달렸더랍니다. 그러나 빗길에 미끄러져 마당 한가운데 고인 진흙탕에 처박히고 말았지요.
"손창식! 재물을 탐내어 무고한 처녀를 죽이고, 관아에 뇌물을 먹여 누명까지 씌운 죄, 네 어찌 하늘의 그물을 벗어날 성싶으냐!"
도현의 호령과 함께 포졸들이 주막을 에워쌌고, 손창식은 진흙투성이가 된 채 머리를 찧으며 덜덜 떨었습니다.
"내, 내가 죽였다! 제발 저 원혼인지 사람인지 모를 것을 내 눈앞에서 치워다오! 밤마다 목이 졸려 숨을 쉴 수가 없었단 말이다!"
비열한 악인의 자백이 천둥소리 사이로 울려 퍼지며 서대문 일대를 뒤흔들던 공포의 실체가 비로소 낱낱이 밝혀졌지요. 손창식은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모진 형벌 끝에 능지처참의 명을 받았고, 연화의 시신은 양지바른 곳에 묻혀 한을 풀게 되었더랍니다.
맺으며
빗속에서 곡을 하던 처녀 귀신은 결국 억울하게 죽은 피붙이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제 목숨을 걸고 밤길을 헤매던 어린 누이의 처절한 몸부림이었지요. 궂은비가 그치고 먹구름이 걷힌 서대문 언덕에는 연화의 넋을 위로하듯 맑은 햇살이 오롯이 내리쬐었답니다.
혹여 여러분도 비바람 치는 밤, 도성 성곽 길을 걷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슬픈 곡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한밤중 공동묘지에서 주워 온 놋요강이 날마다 금반지를 뱉어낸 기이한 사연.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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