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 집 쌀 삼백 석을 훔친 자가 포도청 뜰에서 호통을 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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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짙게 깔린 한양 북촌, 높다란 솟을대문 안쪽에서 별안간 묵직한 자물쇠 부서지는 소리가 났더랍니다. "도둑이야! 곳간 문이 열렸다!" 야경꾼의 다급한 꽹과리 소리가 고요한 밤공기를 찢어발겼지만, 이미 커다란 그림자 여럿이 쌀가마니를 짊어지고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지요.
그 밤, 조정의 실세라 불리던 좌의정 윤창호의 사가에서 무려 삼백 석이나 되는 쌀과 은화 천 냥이 털렸습니다. 기이하게도 털린 곳간 벽에는 붉은 먹으로 큼지막한 참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그림이 버젓이 남겨져 있었지요.
어둠 속을 나는 참새

이 신출귀몰한 도둑의 우두머리는 저잣거리에서 '참새'라 불리는 사내, 배동출이었습니다. 동출은 본래 함경도 변방의 군관 출신이었으나, 부패한 상관의 모함으로 쫓겨난 뒤 도탄에 빠진 백성을 돕는 의적이 된 자였지요.
날이 밝자마자 동출 패거리는 훔쳐낸 쌀을 마포나루 뒷골목과 청계천 다리 밑의 굶주린 움막촌에 모조리 뿌렸더랍니다. 며칠 굶어 눈이 퀭하던 백성들은 쌀자루를 받아 들고 연신 마른눈물을 훔쳤지요. 동출은 허름한 갓을 고쳐 쓰며 부하들에게 당부했습니다.
"이 쌀은 원래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짠 피눈물이다. 썩어 나뒹굴던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뿐이니, 한 톨도 네놈들 뱃속에 허투루 채우지 마라."
하지만 윤창호는 당대의 권력자이자 지독한 수전노였습니다. 자신의 곳간이 털렸다는 소식에 노발대발한 윤 대감은 포도청을 쥐고 흔들었지요.
"포도대장! 사흘을 주겠네. 내 곳간을 턴 불한당 놈을 잡아 능지처참하지 못하면, 자네 목이 먼저 달아날 줄 알게!"
사헌부 뜰에 선 도둑

윤 대감의 서슬 퍼런 닦달에 한양 바닥이 발칵 뒤집혔고, 닷새 만에 배동출은 청파동 골목에서 포졸들에게 포위당하고 말았습니다. 동출은 벗어날 틈이 있었음에도 어찌 된 영문인지 순순히 오라를 받았지요. 품속에서 낡고 붉은 천 주머니 하나를 단단히 쥐어쥔 채였습니다.
이 소식은 대궐 안까지 전해졌고, 공정하고 대쪽 같기로 소문난 형조판서 신이겸이 이 기이한 도적의 친국을 맡게 되었습니다. 좌의정 윤창호 역시 서슬 퍼런 눈으로 판결청 상석에 털썩 걸터앉아 있었지요.
윤 대감이 먼저 가래침을 뱉으며 죄인을 쏘아보았습니다.
"천하에 몹쓸 도적 놈 같으니! 감히 대신의 사가를 침범해 재물을 약탈하다니, 당장 네놈의 사지를 찢어 죽여야 마땅하다!"
그러자 포승줄에 묶여 무릎을 꿇고 있던 동출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대감, 제가 훔친 것은 대감의 재물이 아닙니다. 그저 길가에 버려진 주인의 물건을 찾아 돌려주었을 뿐이지요."
"무엇이라? 네놈이 훔친 쌀 삼백 석과 은전이 내 곳간에서 나왔거늘, 어디서 해괴망측한 궤변을 늘어놓느냐!"
윤 대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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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간 바닥의 붉은 표식

지켜보던 판서 신이겸이 무겁게 입을 열었더랍니다.
"죄인은 들으라. 네가 의적을 자처하며 굶주린 이들에게 곡식을 나눠주었다 한들, 남의 담을 넘은 것은 엄연한 국법을 어긴 도둑질이다. 네 어찌 그것을 주인의 물건이라 하는가?"
배동출은 기다렸다는 듯 가슴팍에서 품고 있던 붉은 천 주머니를 바닥에 툭 떨어뜨렸습니다. 포졸이 주워 신 판서에게 바친 주머니 안에서는, 작고 녹슨 청동 호패 하나와 묵은 장부 한 권이 나왔지요.
"나으리, 저 장부를 펼쳐 보십시오. 십 년 전 신유년, 함경도에 극심한 기근이 들어 조정에서 쌀 오천 석의 구휼미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함경관찰사로 부임하여 구휼미의 절반을 빼돌려 제 배를 채운 자가 누구인지 적혀 있습니다!"
좌의정 윤창호의 안색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했습니다. 신 판서가 장부를 넘기자, 먹물이 바래지 않은 글씨와 함께 윤창호의 낙관이 뚜렷하게 박혀 있었지요.
"네, 네놈이 감히 어디서 위조된 장부를 들이미는 것이냐!"
윤 대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지만,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동출이 윤 대감을 매섭게 쏘아보며 말을 이었습니다.
"위조라고요? 훔쳐낸 쌀자루 바닥마다 '진휼(賑恤)' 두 글자가 불도장으로 찍혀 있었습니다. 십 년 동안 썩혀가며 곳간 깊숙이 숨겨둔 백성의 피땀인데, 어찌 당신의 것이라 우기십니까! 제가 남긴 참새 그림은 그 진휼미 장부의 압인과 꼭 같은 모양입니다!"
명판관의 서릿발 판결
장내에 쥐 죽은 듯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신이겸 판서는 장부와 호패를 꼼꼼히 살핀 뒤, 차가운 눈빛으로 윤창호를 바라보았지요. 윤 대감은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며 입술을 바르르 떨 뿐, 대꾸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신 판서가 마침내 형벌 판결봉을 높이 들었습니다.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관아 뜰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지요.
"도적 배동출은 들으라. 사사로이 담을 넘어 곡식을 훔친 죄는 무거우나, 그 곡식은 본디 십 년 전 백성에게 돌아갔어야 할 조정의 진휼미였다. 장물로 사리사욕을 채우지 아니하고 본래 주인인 굶주린 백성에게 돌려주었으니, 네 의기는 가상하나 법도를 어긴 죄를 물어 곤장 삼십 대를 치고 북방의 변방 수자자리로 보내 충군토록 한다!"
동출은 조용히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이어 신 판서의 시선이 윤창호에게 꽂혔더랍니다.
"그리고 좌의정 윤창호는 국록을 먹는 재상의 신분으로 기민의 구휼미를 횡령하고 이를 사가에 은닉하였으니, 이는 종사를 뒤흔든 대역죄에 버금간다! 좌상을 즉시 금부옥에 하옥하고, 남은 가산을 모조리 적몰하여 관아의 헐벗은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상주하겠다!"
"판서! 감히 네놈이 나를…!"
윤 대감이 길길이 날뛰었으나, 신 판서의 호통 한 번에 포졸들이 달려들어 그의 관모와 패옥을 거칠게 벗겨냈습니다. 관아 문밖에서 숨을 죽이고 판결을 지켜보던 백성들의 환호성이 북촌 하늘을 뒤흔들었지요.
맺으며
권세를 믿고 백성의 피를 빨아 곳간을 채웠던 간신은 결국 변방으로 귀양을 떠나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곤장을 맞고 북방으로 향하던 의적의 등 뒤에는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왔다지요. 세상의 법이 굽어질 때 도둑이 의인이 되고 재상이 도적이 되는 법이니, 참으로 기막힌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혹여 여러분도 탐욕으로 가득 찬 곳간을 통쾌하게 털어낸 또 다른 의적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깊은 밤, 벼락 맞은 고목나무 속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통곡 소리와 사라진 신부.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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