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스런 지주가 빼앗은 기름진 옥토에서 드러난 참혹한 백골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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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숨어버린 그믐밤, 황해도 봉산 땅의 한 논바닥에서 서슬 퍼런 쇠스랑이 흙을 가르는 소리가 사납게 울려 퍼졌더랍니다.
"조금만 더 깊이 파보거라! 이 기름진 땅속에 물길만 새로 내면 올가을엔 쌀이 수백 섬은 쏟아질 터이니!"
피눈물로 빼앗은 기름진 땅

숙종 임금 시절, 봉산 고을에는 소문난 구두쇠 지주 배만복이 살고 있었지요. 배만복은 제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이웃의 피고름을 짜내는 일도 서슴지 않는 모진 위인이었습니다. 그의 눈독이 닿은 곳은 마을의 가난한 소작농 강돌쇠가 대대로 피땀 흘려 일군 닷 마지기 논, 이른바 '문전옥답'이었습니다.
강돌쇠는 말문이 막히고 몸이 성치 않은 홀어머니를 모시며 그저 땅만 바라보고 사는 순박한 사내였지요. 그의 유일한 바람은 어머니께 따뜻한 이밥 한 그릇 배불리 대접하고 남들처럼 소박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답니다.
하지만 배만복은 흉년이 들자 돌쇠에게 곡식을 빌려주며 간계를 꾸몄습니다. 갚을 날이 되자 열 배가 넘는 이자를 턱없이 들이밀며 윽박질렀지요.
"내 돈을 떼어먹으려 들다니, 네놈이 관아의 곤장을 맞아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살고 싶거든 그 닷 마지기 논문서를 당장 내놓거라!"
"배 대감마님, 제발 통촉하여 주십시오. 이 논은 저희 삼대가 목숨 걸고 일군 유일한 목숨줄입니다요!"
돌쇠가 흙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애원했으나 배만복의 비정한 얼굴엔 비웃음만 어릴 뿐이었습니다. 결국 배만복은 건장한 노비들을 끌고 가 돌쇠의 늙은 어머니를 마당에 내동댕이치고 기어이 논문서를 빼앗아 가고 말았지요.
어둠 속에서 파낸 하얀 뼈

봄비가 촉촉이 내리던 날 밤, 배만복은 빼앗은 논의 물길을 넓히고자 머슴들을 닦달해 밤샘 부역을 시켰습니다. 한창 괭이질을 하던 머슴 삼월이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더랍니다.
"아이고, 나리! 뼛조각입니다요! 사람 뼈가 나왔습니다요!"
배만복이 횃불을 들이대니 진흙투성이 흙더미 사이로 희뿌연 백골 한 구가 드러나 있었습니다. 머리뼈 뒤편에는 날카로운 흉기에 찍힌 듯 손가락만 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지요.
"쉿! 주둥이를 닥치지 못할까! 재수 없게 무슨 귀신 소리냐!"
배만복은 버럭 화를 내며 머슴들을 윽박질렀습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횃불보다 더 파르르 떨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배만복에게는 삼십 년 전, 어린 나이에 집을 나간 뒤 소식이 끊겼다는 큰형님이 한 분 계셨지요. 아버지가 물려준 가문의 전답을 혼자 독차지하고자 형님과 심하게 다툰 직후 형님이 감쪽같이 사라졌던 터였습니다. 배만복은 속으로 흉흉한 의심을 품으며 백골의 품을 뒤적거리게 했습니다.
"나리, 백골의 손가락에 이런 게 끼워져 있었습니다요."
머슴이 건넨 것은 흙탕물이 잔뜩 묻은 옥가락지 하나와 녹슨 놋쇠 노리개였습니다. 옥가락지 안쪽에는 '배(裵)' 자가 선명하게 음각되어 있었지요. 배만복의 입술이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그것은 삼십 년 전 집을 나간 자신의 친형, 배만수에게 아버지가 물려주었던 가문의 징표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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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로 끌려간 효자

"이놈 강돌쇠! 네놈의 조상 놈들이 감히 내 형님을 살해하고 이 논바닥에 암매장한 것이 틀림없다!"
배만복은 날이 밝자마자 백골을 관아로 끌고 가 사또 앞에 고발했습니다. 제 형의 시신을 찾았다는 슬픔보다는, 이 기회에 돌쇠 모자를 살인자의 후손으로 몰아 완전히 고을에서 내쫓고 논을 영영 제 차지로 굳히려는 심산이었지요.
사또의 서슬 퍼런 추달이 시작되었습니다.
"강돌쇠, 네 놈의 조부가 이 옥가락지의 주인을 죽여 논에 묻었느냐?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네놈의 다리뼈를 분질러 놓을 것이다!"
돌쇠는 억울함에 피눈물을 흘리며 소리쳤습니다.
"사또 나리! 저희 집안은 삼대째 파리 한 마리도 함부로 죽이지 못하고 땅만 파먹던 소작농입니다요!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 리가 만무합니다!"
그때, 포졸들의 제지를 뚫고 관아 뜰로 기어들어 온 이가 있었으니, 바로 돌쇠의 늙고 말 못 하는 어머니였습니다. 노파는 흙바닥을 기며 백골 옆에 놓인 녹슨 놋쇠 노리개를 보더니, 목구멍에서 짐승 같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어… 어버… 아아악!"
노파는 성치 않은 손으로 제 가슴을 쥐어뜯으며 백골을 껴안고 오열했습니다. 관아에 모인 구경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지요.
드러난 핏줄과 비정한 칼날
그때 고을 사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사또는 노파가 쥐고 있는 놋쇠 노리개를 유심히 살피더니 배만복을 서늘한 눈초리로 쏘아보았습니다.
"배만복, 너는 아까 이 백골이 삼십 년 전 행방불명된 네 친형이라 주장했렷다?"
"예, 사또 나리! 저 옥가락지가 바로 저희 선친께서 형님에게 물려주신 가보입니다요!"
배만복이 득의양양하게 대답하자 사또가 헛웃음을 쳤습니다.
"그렇다면 이 놋쇠 노리개는 어찌 설명할 테냐? 이 노리개는 천민이나 노비의 여식들이 패물 대신 차던 물건이다. 게다가 여기 새겨진 표식은 관아의 관비 출신임을 증명하는 낙인이다!"
사또의 호통에 노파가 가슴속에서 낡아서 바스러질 것 같은 한지 한 장을 꺼내어 바쳤습니다. 그것은 삼십 년 전, 배만복의 선친이 배만복 몰래 작성해 준 비망기였습니다.
진실은 참으로 기가 막힌 것이었습니다. 삼십 년 전, 배만복의 친형 배만수는 집안의 노비였던 지금의 돌쇠 어머니를 진심으로 연모하여 혼인을 청했더랍니다. 그러나 욕심 많고 패륜적인 동생 배만복은 천한 계집 때문에 가문의 재산이 쪼개질까 두려워, 형님을 야산으로 유인해 돌로 머리를 쳐 죽이고는 갓 개간하던 논에 묻어버렸던 것이지요.
배만복은 자신이 저지른 옛 악행을 까맣게 잊고, 그저 형이 도망친 줄로만 알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숨어서 그 참극을 모두 목격했던 돌쇠의 어머니는, 충격으로 말문이 막힌 채 배 속에 든 형님의 핏줄을 살리기 위해 가난한 강씨 집안으로 개가하여 돌쇠를 낳아 길렀던 것이었습니다.
즉, 백골은 강돌쇠의 친아버지였으며, 강돌쇠는 배만복의 친조카였던 셈이지요. 백골의 머리에 뚫린 구멍은 삼십 년 전 배만복이 휘두른 뾰족한 돌도끼의 자국과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죽인 건… 아니, 형님이 왜 저놈의 아비란 말이냐!"
사색이 된 배만복이 제 발로 실토를 해버리자, 사또의 불호령이 관아를 뒤흔들었습니다.
"네 이놈 배만복! 재물에 눈이 멀어 친형을 때려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제 조카의 가산까지 빼앗으려 들다니!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
맺으며
사또는 대역부도한 패륜을 저지른 배만복의 전 재산을 몰수하여 본래의 주인인 강돌쇠 모자에게 돌려주었더랍니다. 배만복은 모진 곤장을 맞고 머나먼 절해고도로 유배를 떠나다 길 위에서 피를 토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지요.
돌쇠는 마침내 친아버지의 유골을 양지바른 선산에 정성껏 묻어드리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며 그 기름진 논에서 대대로 복을 누리며 살았다고 합니다. 탐욕으로 덮어둔 죄악은 땅속 깊이 묻어도, 결국 제 피붙이의 손을 빌려 백일하에 드러나는 법인가 봅니다.
혹여 여러분도 억울하게 묻힌 진실이 수십 년 세월을 뚫고 기어이 고개를 내민 기이한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한밤중 폐가에서 홀로 제사를 지내던 기생이 통곡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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