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묵어간 나그네가 두고 간 낡은 부채, 이튿날 사또가 사색이 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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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임금 때, 충청도 어느 산골 마을에 비바람이 몰아치던 밤이었더랍니다.
"계시오? 길 잃은 사람이오. 하룻밤만 재워 주시오."
허름한 도포에 다 해진 갓을 쓴 사내가 사립문을 두드렸지요. 그 집은 남편을 잃고 열 살 난 아들 돌쇠와 단둘이 사는 과부 윤씨의 초가였습니다.
비바람 치던 밤의 손님

사실 사내는 그 전에 마을에서 제일 큰 기와집부터 찾아갔었습니다. 최 진사 댁이었지요. 대문을 열고 나온 최 진사는 사내의 행색을 훑어보더니 침을 탁 뱉었습니다.
"거지 같은 놈이 어디서 재워 달라 해? 썩 꺼지거라!"
그렇게 쫓겨난 사내가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윤씨네 초가였던 것이지요.
윤씨는 쌀독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남은 것은 쌀 한 줌. 내일 아침 돌쇠에게 먹일 몫이었습니다. 윤씨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한 줌으로 묽은 죽을 쑤었습니다.
"차린 것이 없어 송구합니다. 몸이라도 녹이시지요."
돌쇠는 하나뿐인 솜이불을 말없이 나그네에게 덮어 주었습니다.
가짜 차용증

죽을 다 비운 나그네가 물었습니다.
"부인, 집 안에 수심이 가득해 보이는데 무슨 걱정이 있소?"
윤씨는 한참을 망설이다 털어놓았습니다.
"돌아가신 남편이 생전에 최 진사 댁에서 쌀 세 말을 빌렸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자 최 진사가 차용증을 내밀었는데, 거기엔 세 말이 아니라 서른 섬이라 적혀 있지 뭡니까. 내일까지 갚지 못하면 이 집과 밭을 다 내놓으라 합니다."
나그네의 눈빛이 잠깐 날카로워졌습니다.
"그 차용증, 언제 썼다 하던가요?"
"오 년 전 갑인년이라 하더이다. 최 진사 도장도 찍혀 있고요."
나그네는 더 묻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이튿날 새벽, 윤씨가 눈을 떴을 때 나그네는 이미 떠나고 없었습니다. 머리맡에는 낡은 부채 하나와 쪽지 한 장만 놓여 있었지요.
"이 부채를 절대 남에게 주지 마시오. 관아에 가거든 사또 앞에서 펴 보이시오."
관아에 끌려간 과부

그날 아침, 최 진사가 머슴 넷을 데리고 들이닥쳤습니다.
"서른 섬, 가져왔느냐? 없으면 당장 이 집에서 나가거라!"
윤씨가 울며 매달렸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결국 윤씨는 관아로 끌려가 사또 앞에 꿇어앉았습니다.
그런데 사또와 최 진사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습니다. 최 진사가 해마다 사또에게 쌀가마를 바쳐 온 사이였거든요.
"차용증에 도장까지 찍혀 있으니 더 볼 것도 없다. 과부의 집과 밭은 최 진사에게 넘긴다!"
사또가 판결을 내리려는 순간, 윤씨가 떨리는 손으로 품에서 부채를 꺼냈습니다.
"사또, 지난밤 저희 집에 묵어간 손님이 이것을 사또 앞에서 펴 보이라 했습니다."
낡은 부채에 숨은 비밀

사또는 코웃음을 치며 부채를 펼쳤습니다. 그런데 부채를 보는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부채 안쪽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거든요.
"이 집 과부의 일은 내가 직접 살피겠다."
글귀 아래에는 붉은 도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습니다. 어명을 받은 암행어사의 인장이었지요.
그때였습니다.
"암행어사 출두야!"
관아 대문이 열리며 역졸들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그 뒤로 위풍당당하게 걸어 들어오는 사람은 바로 지난밤 윤씨네 죽 한 그릇을 비운 그 나그네였습니다.
어사는 최 진사의 차용증을 집어 들었습니다.
"이 차용증은 오 년 전 갑인년에 썼다 하였지?"
"그, 그렇습니다요."
"그런데 이상하구나. 여기 찍힌 네 도장 말이다."
어사가 손짓하자 장터의 늙은 도장장이가 끌려 나왔습니다.
"나으리, 이 도장은 쇤네가 작년 가을에 새로 새겨 드린 것입니다. 오 년 전엔 있지도 않던 도장이지요."
어젯밤 최 진사 집에서 쫓겨난 뒤, 어사는 장터부터 들러 이것을 확인해 두었던 것입니다.
최 진사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고, 뇌물을 받아 온 사또도 함께 파직되었습니다. 윤씨는 집과 밭을 지켰고, 최 진사가 억지로 빼앗아 온 다른 집들의 문서도 모두 주인에게 돌아갔습니다.
맺으며
떠나기 전, 어사는 윤씨 집 마루에 쌀 열 가마를 내려놓고 말했습니다.
"부인이 마지막 쌀 한 줌으로 쑤어 준 그 죽, 내 평생 먹은 어느 상보다 따뜻했소."
그리고 돌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마디를 덧붙였지요.
"이불을 내준 그 마음으로 글을 읽거라. 훗날 너도 백성을 살피는 사람이 될 게다."
십오 년 뒤, 과거 시험장에서 장원으로 이름이 불린 젊은이가 있었으니 그 이름이 바로 윤돌쇠였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했다가 뜻밖의 일을 겪은 적이 있으신가요?
다음 이야기 예고: 혼례 날 신부가 관아로 달려가 새신랑의 뺨을 때린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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