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간 앞 거지를 내쫓던 인색한 부자가 불난 밤 그 거지에게 큰절을 올린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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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임금 때, 경상도 어느 고을에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늘어나던 해였더랍니다.
고을에서 제일가는 부자 황 부자의 곳간에는 쌀가마가 천장까지 쌓여 있었지요. 그런데도 황 부자는 쌀값이 더 오르기만 기다리며 곳간 문을 꽁꽁 걸어 잠갔습니다.
그 곳간 담 밑에는 날마다 누더기를 걸친 늙은 거지 하나가 앉아 있었습니다.
곳간 담 밑의 늙은 거지

"나리, 쉰밥이라도 한 술 주시구려."
거지가 손을 내밀자 황 부자는 지팡이로 그 손을 탁 쳐 냈습니다.
"내 곳간 앞에서 재수 없게 굴지 말고 썩 꺼지거라!"
거지는 맞은 손을 문지르며 곳간 쪽을 한참 바라보더니 나직이 말했습니다.
"곳간이 가득하면 지키는 눈도 많아야 하는 법이오. 사흘 안에 저 곳간에 불이 날 게요."
"뭐라? 이놈이 저주를 퍼붓는구나!"
황 부자는 머슴들을 불러 거지를 마을 밖으로 내쫓게 했습니다.
그날 밤, 황 부자는 사랑방 벽에 걸린 낡은 나무패를 괜히 한 번 쳐다보았습니다. 반으로 쪼개진 나무패였지요. 돌아가신 아버지가 숨을 거두며 남긴 말이 있었거든요.
"이 패의 나머지 반쪽을 가진 이를 만나거든, 무슨 일이 있어도 큰절로 은혜를 갚거라."
황 부자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삼십 년이 지나도록 그런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으니까요.
곳간지기의 수상한 밤

이튿날 밤, 쫓겨났던 거지가 몰래 곳간 뒤편 대숲에 숨어들었습니다.
자정이 넘자 누군가 곳간 뒷문을 열고 쌀자루를 어깨에 메고 나왔습니다. 황 부자가 가장 믿는 곳간지기 덕보였지요. 덕보는 몇 해째 밤마다 쌀을 빼돌려 이웃 고을에 몰래 팔아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덕보의 혼잣말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주인 놈이 내일 곳간을 연다지? 장부를 맞춰 보면 내 짓이 다 드러날 텐데… 차라리 불을 내 버리면 쌀이 몇 가마 비었는지 누가 알겠어."
거지는 숨을 죽였습니다. 덕보가 메고 가는 쌀자루에서 쌀알이 한 톨씩 새어 나와 길에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거지는 그 쌀알을 하나하나 주워 주머니에 담으며 덕보의 뒤를 밟았지요.
불길 속에 뛰어든 거지

사흘째 되던 밤, 정말로 곳간 쪽에서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불이야! 곳간에 불이 났다!"
황 부자가 버선발로 뛰어나왔을 때, 불은 곳간을 넘어 곳간 옆 별채까지 번지고 있었습니다. 그 별채에는 황 부자의 여덟 살 난 외아들이 잠들어 있었지요.
"내 아들! 누가 내 아들 좀 구해 주시오!"
머슴들은 불길이 무서워 아무도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때 누더기를 걸친 그림자 하나가 물동이를 뒤집어쓰고 불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바로 그 늙은 거지였습니다.
한참 뒤, 거지는 그을음투성이가 된 채 아이를 품에 안고 걸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덕보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리! 이 거지 놈이 불을 질렀습니다! 사흘 전에 불이 날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머슴들이 거지를 붙잡아 땅바닥에 무릎을 꿇렸습니다.
쌀알이 가리킨 범인과 반쪽 나무패
거지는 아무 말 없이 주머니를 털어 쌀알을 땅에 쏟았습니다.
"나리, 이 쌀알을 따라가 보시오. 곳간 뒷문에서 시작해 덕보네 집 헛간까지 이어져 있을 게요. 그 헛간에 나리 댁 낙인이 찍힌 쌀자루가 쌓여 있을 것이오."
황 부자가 횃불을 들고 쌀알을 따라가 보니, 정말로 덕보의 헛간에서 황씨 집안 낙인이 찍힌 쌀자루 서른 개가 나왔습니다. 덕보는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고 말았지요.
황 부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영감, 내가 그리 모질게 대했는데 어찌 내 아들을 구했소?"
거지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습니다. 반으로 쪼개진 낡은 나무패였습니다.
"삼십 년 전 흉년에, 굶어 죽어 가던 젊은이에게 볍씨 한 가마를 내준 적이 있소. 그 젊은이가 이 패를 쪼개 반쪽을 주며 꼭 갚겠다 했지요. 그게 당신 아버지였소."
황 부자는 사랑방으로 달려가 벽에 걸린 반쪽을 가져왔습니다. 두 쪽을 맞대자 갈라진 나뭇결이 한 치 어긋남 없이 딱 들어맞았습니다.
황 부자는 그 자리에서 거지 앞에 엎드려 이마를 땅에 대고 큰절을 올렸습니다.
"아버지의 은인을 내 손으로 내쫓았습니다. 저를 용서하십시오."
맺으며
그날 아침, 황 부자는 남은 곳간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배고픈 이는 누구든 와서 쌀을 가져가시오. 값은 받지 않겠소!"
늙은 거지는 황 부자의 집에서 남은 생을 편히 지냈고, 그해 겨울 그 고을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이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누군가의 겉모습만 보고 문을 닫았다가 뒤늦게 후회한 적이 있으신가요?
다음 이야기 예고: 야심한 밤 서당을 찾아온 소복 차림의 과부 앞에 젊은 훈장이 무릎을 꿇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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