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서당의 글 읽는 귀신과 장원급제한 벗의 피 묻은 벼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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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이 사납게 몰아치던 밤이었습니다. 경상도 안동 외딴 산자락, 버려진 서당 문창살 너머로 은은한 등불이 새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자왈,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
사람의 발길이 끊긴 지 십 년도 넘은 흉가에서, 낭랑한 글 읽는 소리가 서늘한 바람을 타고 골짜기에 울려 퍼졌더랍니다.
비 내리는 밤의 기이한 글소리

숙종 임금 시절, 과거 길에 올랐던 남양 홍씨 가문의 선비 홍진우는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피해 산속 폐서당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추위에 떨며 불을 지필 곳을 찾던 진우는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글소리에 숨을 멎었습니다. 조심스레 창호지 구멍으로 안을 엿보자, 창백한 얼굴에 해진 백립을 쓴 청년이 낡은 목판본을 앞에 두고 홀로 책을 낭독하고 있었지요.
인기척에 고개를 든 청년은 귀신처럼 서늘한 눈빛으로 진우를 응시했습니다. 그의 발치에는 시커멓게 얼룩진 석문(石紋) 벼루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진우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이 깊은 밤에 홀로 글을 읽으시는 공은 대체 뉘시오?"
가난한 두 벗의 맹세

청년은 책을 덮더니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성균관 유생이었던 윤자경이라 하오. 십 년 전 이 서당에서 벗과 함께 과거를 준비하던 몸이지요."
자경의 사연은 기구했습니다. 본래 안동 땅의 몰락한 양반 집안 출신이던 자경은 재주가 빼어났으나 가세가 몹시 기울어 끼니를 잇기 힘들었습니다.
그에게는 죽마고우이자 부유한 토호의 자제인 배현도라는 벗이 있었습니다. 현도는 학문이 부족하여 과거에 매번 낙방했으나 욕심은 하늘을 찔렀지요.
자경이 먼 산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속삭였습니다.
"현도는 늘 내 문장과 글씨를 부러워했소. 그가 내게 제안했더랍니다. '자경아, 네가 벼루에 먹을 갈아 문장을 지어주면, 내가 급제한 뒤 너를 높은 벼슬자리에 천거하마'라고 말이오."
피 묻은 벼루와 사라진 답안
자경은 가문을 일으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제 목숨과도 같던 글을 벗에게 주기로 결심했습니다.
과거 시험 전날 밤, 두 사람은 바로 이 서당에서 마지막으로 문장을 다듬었습니다. 자경은 피를 토하듯 절묘한 대책문(對策文)을 지어 종이에 적어 내려갔지요.
"자, 이것이 내 모든 학문과 혼을 갈아 넣은 글일세. 내일 과거장에서 부디 뜻을 이루게."
자경이 글씨가 마르기를 기다리며 흐뭇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글을 받아 든 현도의 눈빛은 순식간에 탐욕과 살기로 번뜩였습니다.
현도는 속으로 차갑게 중얼거렸습니다.
'네놈이 살아있는 한, 내 급제가 네 문장 덕분이라는 탄로가 날지도 모른다.'
현도는 묵직한 석문 벼루를 번쩍 들어 올려 방심하고 있던 자경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붉은 피가 서탁과 벼루로 튀었고, 자경은 바닥에 쓰러져 거친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현도야…… 어찌하여……."
"자경아, 저승에서 내 출세를 지켜보아라. 너의 영광은 이제 온전히 내 것이다."
현도는 피 묻은 답안지를 챙긴 뒤, 숨이 끊어져 가는 자경을 서당 마루 밑 깊은 구덩이에 밀어 넣고 흙으로 덮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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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에서 온 새로운 어사
귀신의 입에서 흘러나온 참혹한 진실에 진우는 소름이 돋아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배현도는 그 글로 장원급제하여 지금은 당상관의 반열에 올랐소. 하지만 나는 억울함에 눈을 감지 못하고, 매일 밤 이곳에서 빼앗긴 내 글을 읽고 있는 것이오."
자경의 원혼이 피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습니다.
진우는 품속에서 마패 하나를 꺼내 보였습니다.
"사실 나는 이번에 영남 안핵사로 비밀리에 내려온 어사 홍진우라 하오. 그대의 원통함을 내 어찌 지나치겠소?"
자경의 혼령이 눈을 크게 뜨더니 바닥의 벼루를 가리켰습니다.
"현도가 가져간 답안지 끝에는 내 피로 찍힌 벼루의 귀퉁이 자국이 선명할 것이오. 그 벼루 바닥에는 '자경(子敬)'이라는 내 자(字)가 새겨져 있소. 이것이 결정적인 증거요!"
진우는 그 벼루를 품에 단단히 챙겼고, 닭 울음소리와 함께 자경의 모습은 안개처럼 흩어졌습니다.
마루 밑의 유골과 드러난 진실
날이 밝자마자 진우는 관아의 포졸들을 폐서당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마루 밑을 파내자, 십 년 세월 동안 썩지 않고 웅크려 있던 청년의 유골이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진우는 한양으로 급히 파발을 띄워 당시의 과거 답안지를 보관하던 예조의 서고를 뒤졌습니다. 과연 십 년 전 장원급제한 배현도의 답안지 모퉁이에는 벼루 모서리로 찍힌 붉은 인주 같은 핏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홍진우는 조정에 복명하며 배현도의 대역죄를 낱낱이 고발했습니다.
"배현도는 벗을 살해하고 그의 답안을 훔쳐 조정을 기만하였나이다!"
현도는 진우가 내민 피 묻은 벼루와 자경의 유골을 보자 사색이 되어 벌벌 떨었습니다.
"아, 아니오! 헛소문이오! 저것은 조작된 모함입니다!"
하지만 벼루 바닥의 글자와 답안지의 핏자국 규격이 털끝만큼의 오차도 없이 맞아떨어지자, 배현도는 더는 발뺌하지 못하고 바닥에 엎드려 죄를 자복했습니다.
배현도는 관직을 삭탈당하고 의금부로 압송되어 참형에 처해졌습니다.
자경의 유골은 양지바른 선산에 정중히 안장되었고, 그의 억울한 죽음과 빼어난 문장은 임금에게도 알려져 증직(贈職)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맺으며
모든 원한이 풀리던 날 밤, 홍진우의 꿈속에 단정한 도포를 입은 윤자경이 나타나 공손히 읍을 하며 미소를 지었더랍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벼루에 스며든 피와 원혼의 한은 끝내 감출 수 없었던 것이지요.
혹여 여러분도 늦은 밤 비 내리는 옛 고택 곁을 지나다 홀로 글 읽는 서글픈 목소리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백정의 칼날 끝에서 눈물을 흘리며 살려달라 애원하던 천 년 묵은 멧돼지의 비밀.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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