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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건져준 은인을 관아에 밀고한 주막 주인의 피 묻은 외상장부

지은미소 2026. 10. 28.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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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옥천 땅, 험준하기로 소문난 마성산 자락에 자리 잡은 묵은골 주막. 비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늦은 밤, 포졸 십여 명이 횃불을 밝히며 주막 문을 박차고 들이닥쳤더랍니다.

방 안에서 피곤에 지쳐 잠들어 있던 사내의 양팔이 순식간에 꺾였습니다. 포교가 사내의 멱살을 잡고 거칠게 흔들었지요. 사내의 이름은 조승호,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향하던 몰락 양반 가문의 선비였습니다.

은혜를 품고 찾아온 길손

때는 숙종 임금 시절이었습니다. 조승호는 타고난 성품이 곧고 바른 선비였으나, 집안이 기울어 품삯을 모아 겨우 한양 길에 올랐지요. 그가 일부러 험한 고갯길을 돌아 묵은골 주막을 찾은 까닭은 따로 있었더랍니다.

주막 주인 박칠복은 삼 년 전, 추운 겨울날 길가에 쓰러져 얼어 죽어가던 것을 승호가 제 털옷을 벗겨 입히고 주머니를 털어 살려낸 자였습니다. 당시 칠복은 눈물을 쏟으며 땅바닥에 이마를 찧었지요.

"나리, 이 미천한 놈 목숨을 살려주셨으니 언젠가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요. 옥천 마성산 아래 주막을 열 터이니, 지나실 일 있으면 부디 찾아주십시오!"

칠복의 말을 기억한 승호는 먼 길을 돌아 그 주막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칠복은 승호를 보자마자 버선발로 뛰어나와 손을 맞잡았더랍니다.

"아이구, 은인 나리! 어찌 이 누추한 곳까지 오셨습니까! 내 오늘 귀한 술과 고기를 푸짐하게 대접하리다."

기름진 술상 뒤의 번뜩이는 눈

칠복이 내온 상에는 산채와 기름진 돼지고기, 그리고 진한 막걸리가 가득했더랍니다. 승호는 오랜 여독에 지쳐 술잔을 연거푸 비웠지요. 칠복은 짐짓 살가운 표정으로 승호의 낡은 보따리를 힐끔거렸습니다.

"나리, 과거를 보러 가시는 길이면 노잣돈도 넉넉지 않으실 텐데 봇짐이 꽤 묵직해 보입니다요?"

승호는 칠복을 철석같이 믿고 허물없이 속내를 털어놓았습니다.

"돌아가신 선친의 유품인 옥비녀 한 쌍과 고을 어른들이 모아주신 백은 스무 냥이 들어있네. 내 이번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지."

그 말을 들은 칠복의 눈동자에 찰나의 탐욕이 스쳤더랍니다. 칠복은 주막을 차린 뒤 노름에 빠져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고, 당장 며칠 뒤면 빚쟁이들에게 주막을 빼앗길 처지였지요. 승호가 술기운에 곯아떨어지자, 칠복은 방구석에 놓인 낡은 외상장부를 펼쳐 들고 기괴한 미소를 지었더랍니다.

포교들의 포승줄과 빼앗긴 괴나리봇짐

승호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차가운 쇠사슬이 목을 옥죄고 난 뒤였습니다. 옥천 관아의 포교가 승호의 괴나리봇짐을 털어 백은 스무 냥과 옥비녀를 꺼내 들었지요.

"네 이놈! 며칠 전 영동 땅 부잣집을 털고 일가족을 해친 흉악한 도적 놈이 과거 보러 가는 선비 행세를 해?"

승호는 기가 막혀 소리쳤습니다.

"이게 무슨 해괴한 소리요! 나는 영동 땅에는 발도 들인 적이 없소! 저 돈은 내 노잣돈이란 말이오!"

그때 주막 문간 뒤에 숨어 있던 칠복이 슬그머니 기어 나와 관아 포교 앞에 넙죽 엎드렸더랍니다.

"포교 나리! 제 말이 맞지요? 이놈이 어젯밤 술에 취해 영동서 큰 건 하나 털고 왔다며 자랑을 늘어놓기에, 제가 목숨을 걸고 관아에 고변한 것입니다요!"

승호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칠복을 노려보았습니다.

"칠복아! 네놈이 어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느냐! 내가 네 목숨을 살려준 은인이거늘!"

칠복은 차갑게 승호를 외면하며 포교에게 손을 내밀었지요.

"나리, 대역죄인을 잡은 포상금은 나중에 수령님께 청하면 되겠습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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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또의 호통과 붉은 붓 자국

옥천 관아 동헌으로 끌려간 승호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곤장을 맞았더랍니다. 사또는 칠복의 밀고와 증거물로 나온 은전 스무 냥을 보고 승호의 죄를 확정 지으려 했지요.

"네 놈의 봇짐에서 나온 은전과 옥비녀가 바로 영동 도적질의 장물이거늘, 어디서 끝까지 발뺌이냐!"

그 순간, 포졸 하나가 칠복의 품에서 떨어진 물건 하나를 주워 사또에게 바쳤습니다. 그것은 칠복이 손때 묻히며 들고 다니던 낡은 외상장부였더랍니다. 칠복이 당황하여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소리쳤지요.

"사, 사또 나리! 그것은 일개 주막의 하찮은 외상장부일 뿐입니다요! 돌려주십시오!"

사또는 칠복의 수상쩍은 태도에 장부를 넘겨보았습니다. 장부에는 손님들이 외상으로 먹은 국밥과 막걸리 값이 삐뚤빼뚤 적혀 있었지요. 그러나 사또의 눈이 장부의 맨 뒷장에 멈췄더랍니다.

장부 뒤에 숨겨진 핏빛 밀약

장부 맨 뒷장에는 붉은 먹으로 적힌 날짜와 숫자들이 빼곡했습니다. 사또가 장부를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가자 동헌 마당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지요.

"'정묘년 시월 초사흘, 영동 박 진사 댁 털이. 백은 스무 냥과 옥비녀 한 쌍을 취하고 흔적을 지움.' …이게 대체 무슨 글이냐?"

칠복은 사시나무 떨듯 떨며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 그것은… 제가 장난삼아 적은…"

사또가 책상을 쾅 내리쳤더랍니다.

"장난? 이 장부에 적힌 먹물 아래 묻은 붉은 얼룩은 영락없는 사람의 피다! 영동에서 피살된 박 진사의 집안사람을 데려와 확인케 하라!"

사실 영동의 박 진사 댁을 털고 흉계를 꾸민 진짜 도적은 바로 칠복이 속한 도적 떼였더랍니다. 칠복은 장물을 숨겨두고 있다가 빚을 갚기 위해 처분하려던 찰나, 마침 주막을 찾아온 은인 승호의 행색을 보고 간악한 꾀를 낸 것이었지요. 승호의 봇짐에 장물을 몰래 쑤셔 넣고 밀고하여 누명을 씌운 뒤, 포상금까지 챙기려 했던 것입니다. 칠복은 글을 몰라 자신이 영동 도적들과 장물을 나누며 남긴 수결과 피 묻은 범행 기록이 외상장부 뒷장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줄도 몰랐던 것이지요.

맺으며

모든 진실이 백일하에 드러나자 칠복은 그 자리에서 오라를 받고 옥에 갇혔으며, 은혜를 원수로 갚은 대죄로 국경 너머 절도로 유배되어 평생 쇠사슬을 차는 신세가 되었더랍니다. 억울한 누명을 벗은 승호는 관아에서 돌려받은 노잣돈을 쥐고 무사히 한양으로 향했지요. 세상에 눈먼 탐욕으로 남을 웅덩이에 빠뜨리려던 자가 결국 제 발로 판 함정에 스스로 빠지는 꼴을 본 이들은 혀를 내둘렀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은혜를 저버리고 제 꾀에 넘어가 파멸한 사람의 이야기를 또 알고 계신가요?

다음 이야기 예고: 보름달 뜨는 밤마다 사라지는 가난한 옹기장이의 아내와 깨진 독 속에 든 황금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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