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담·괴담

문경새재 도깨비불을 따라간 보부상이 발견한 엽전 궤짝과 핏빛 버선

지은미소 2026. 10. 20.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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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은 문경새재 조령 제삼관문 너머에는 바람마저 숨을 죽이고 있었더랍니다. 뼈를 깎는 늦가을 산바람 속에서, 푸르스름한 불덩이 하나가 허공을 둥둥 떠다니며 길손을 유혹하고 있었지요.

사람들은 그 불을 도깨비불이라 부르며 간담을 서늘해했으나, 그 불빛이 사람의 원한으로 타오르는 혼불인 줄은 아무도 짐작조차 못했더랍니다.

새재 주막의 수상한 주인장

숙종 임금 시절, 경상도 문경 땅에서 한양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성격이 우직하고 발이 빠른 보부상 백만석이 살고 있었습니다. 만석은 십 년 동안 비단과 놋그릇을 팔아 모은 은전 서른 냥을 품에 품고, 고향 늙은 어머니에게 기와집 한 채를 지어 드리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지요.

새재를 넘기 전, 만석은 험준하기로 소문난 꼴두바우 어귀의 외딴 주막에 들러 거친 숨을 골랐습니다. 주막의 주인장은 한쪽 다리를 저는 배칠성이란 사내였는데, 기름진 얼굴에 번들거리는 눈빛이 영 미덥지 못한 자였더랍니다.

배칠성은 만석의 묵직한 괴나리봇짐을 곁눈질하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지요.

"이보시오 길손,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 새재를 넘으려는 게요? 요새 제이관문 골짜기에 사람 홀리는 도깨비불이 나타나 시신도 못 찾고 사라진 길손이 여럿이라오."

만석은 짚신 끈을 바짝 조여 매며 대꾸했습니다.

"어머니 약값이 급해 지체할 수 없습니다. 귀신보다 무서운 것이 사람의 가난인데, 도깨비 따위가 대수겠습니까."

칠성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묘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만석이 탁주 한 사발을 들이켜고 문을 나설 때, 칠성이 등 뒤에서 나직이 중얼거렸지요.

"명줄이 질기면 살아서 넘을 것이고, 재물 욕심이 과하면 뼈도 못 추릴 텐데 쯧쯧."

골짜기를 맴도는 푸른 불꽃

만석이 조령 제이관문을 지나 칠흑 같은 바위틀 골짜기에 접어들었을 때였습니다. 별빛마저 구름에 가려 발밑이 보이지 않더니, 갑자기 사방에서 비린 바람이 훅 끼쳐왔지요.

화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 바위틈에서 주먹만 한 파란 불덩이가 솟아올랐습니다. 불덩이는 공중에서 춤을 추듯 일렁이더니, 만석의 앞길을 가로막고 섰더랍니다.

"허깨비인가, 아니면 정말로 도깨비 장난인가!"

만석은 품속의 낫을 꺼내 쥐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도깨비불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만석의 주위를 세 바퀴 돌더니, 험준한 비탈길 아래로 천천히 날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자기를 따라오라는 듯이 멈췄다 가기를 반복했지요.

"내 너한테 홀려 벼랑으로 떨어질 성싶으냐!"

만석이 소리쳤지만, 불덩이는 귓가에 맴돌며 애처로운 흐느낌 소리를 내는 듯했습니다. 그 불길 속에서 어렴풋이 핏빛 얼룩이 묻은 비단 버선 한 짝이 타오르는 환영이 비쳤더랍니다.

만석은 등골이 서늘해지면서도 이상한 호기심에 이끌려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큰길을 벗어나 칡넝쿨이 우거진 깊은 바위굴 앞에 이르자, 푸른 불덩이는 동굴 바닥으로 뚝 떨어지며 스르르 꺼져버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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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궤짝과 핏자국

만석이 부싯돌을 쳐 횃불을 밝히자, 동굴 안쪽의 참혹한 광경이 눈앞에 드러났습니다. 굴 구석에는 썩어가는 가마니에 덮인 사람의 백골이 뒹굴고 있었고, 그 곁에 묵직한 나무 궤짝 하나가 놓여 있었더랍니다.

"세상에, 이것이 대체 무슨 해괴한 변괴란 말인가!"

만석은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섰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니 백골의 발목에는 붉은 실로 꿰맨 비단 버선이 한 짝 신겨져 있었지요. 조금 전 도깨비불 속에서 보았던 바로 그 버선이었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궤짝의 녹슨 자물쇠를 돌로 내리쳐 부수자, 뚜껑이 열리며 번쩍이는 백동전과 엽전 수백 냥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궤짝 안쪽 구석에 누렇게 바랜 종이 한 장과 은장도 하나가 들어 있었더랍니다.

종이에는 피로 쓴 듯한 흐릿한 글씨가 적혀 있었습니다.

'문경 관아의 전직 포교 배칠성이 내 재물을 탐하여 독주를 먹이고 나를 이 굴에 가두었다. 억울한 원혼이 되어 구천을 맴도니, 이 원한을 풀어주는 자에게 이 궤짝의 모든 재물을 주리라.'

그 순간 만석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까 주막에서 배칠성이 짚신을 고쳐 신을 때 보았던 그의 절룩거리는 오른쪽 발목, 그곳에 감겨 있던 낡은 헝겊 띠가 바로 이 비단 버선과 똑같은 붉은 실밥으로 꿰매어져 있었던 것이지요.

배칠성은 도깨비 소문을 퍼뜨려 사람들의 발길을 끊게 하고, 틈틈이 이 굴을 찾아와 장물을 조금씩 빼돌리던 악귀 같은 살인자였던 것입니다.

함정에 빠진 사냥꾼

"어허, 쥐새끼 한 마리가 제 발로 무덤에 기어들어 왔구나."

동굴 입구에서 묵직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만석이 고개를 돌리자, 횃불을 든 배칠성이 시퍼런 칼을 빼어 들고 비열하게 웃으며 서 있었더랍니다.

칠성은 천천히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오며 칼을 겨누었습니다.

"내가 뒤를 밟길 잘했지. 네놈 괴나리봇짐만 털려 했는데, 기어이 귀신 굴까지 찾아내어 내 비밀을 들춰내? 오늘 밤 너도 저 백골 옆에 눕혀 주마."

만석은 침착하게 궤짝 뒤로 물러서며 외쳤습니다.

"삼 년 전 개성 인삼 상인을 죽이고 그 재물을 빼앗은 자가 바로 네놈이었구나! 관아의 포교였던 놈이 어찌 이런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단 말이냐!"

칠성이 코웃음을 쳤지요.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관아에 알릴 혓바닥이 잘려 나간 뒤에도 그따위 정의를 지껄일 수 있는지 보자꾸나!"

칠성이 번개처럼 칼을 휘두르며 만석의 목덜미를 베어왔습니다. 만석은 재빨리 몸을 웅크려 궤짝 뚜껑으로 칼날을 막아냈지요.

'챙!' 하는 굉음과 함께 칼날이 궤짝 모서리에 깊게 박혔습니다. 칼이 빠지지 않아 칠성이 당황한 틈을 타, 만석은 바닥에 뒹굴던 엽전 한 움큼을 쥐어 칠성의 눈가에 힘껏 뿌렸더랍니다.

"크악! 내 눈!"

칠성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습니다. 만석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품속에 숨겨둔 인삼 상인의 은장도를 꺼내 칠성의 오른쪽 다리, 그 붉은 실로 꿰맨 버선 발목을 힘껏 내리찍었지요.

"이 버선의 주인이 내린 벌이다, 악마 같은 놈아!"

칠성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바닥을 굴렀고, 만석은 칡넝쿨을 뜯어내 칠성의 온몸을 꽁꽁 묶어 버렸습니다.

맺으며

다음 날 아침, 만석은 오라에 묶인 배칠성과 백골, 그리고 엽전 궤짝을 문경 관아 마당에 끌고 가 바쳤더랍니다. 사또는 칠성의 죄상을 낱낱이 밝혀 한양 의금부로 압송하여 참형에 처하게 하였고, 원혼의 한을 풀어주고 도적을 잡은 만석에게는 궤짝 속의 재물 절반을 상금으로 내렸지요. 만석은 억울하게 죽은 개성 상인의 넋을 위로하는 천도재를 정성껏 지내준 뒤, 당당하게 새재를 넘어 어머니 품으로 돌아갔더랍니다.

원한 맺힌 넋이 피워 올린 불꽃은 천 길 어둠 속에서도 기어이 숨겨진 죄악을 밝혀내는 법이지요.

혹시 여러분도 야심한 밤 숲길을 걷다, 억울한 사연을 품고 홀로 타오르는 불빛을 마주친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한양 피맛골 주막의 솥뚜껑 아래서 발견된 양반가의 은비녀와 사라진 기생.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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