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어미 업고 한양 가던 나무꾼이 주막집 은비녀를 품고 오열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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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문경새재 험한 산길, 거친 숨소리가 적막을 찢었더랍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청년의 등에는 다리를 쓰지 못하고 눈까지 먼 늙은 어머니가 업혀 있었지요. 짚신은 이미 닳아 터져 발바닥마다 핏물이 배어 나왔으나, 사내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돌석아, 내 새끼 발이 다 짓물렀구나. 날 그냥 길섶에 버리고 너 혼자 가거라."
"어머니, 그런 소리 마십시오. 한양 의원 댁에 가면 반드시 어머님 눈을 뜨게 할 묘방이 있다 하였습니다. 제가 죽는 한이 있어도 어머님을 업고 끝까지 갈 것입니다."
문경 땅의 효자 나무꾼

때는 숙종 대왕 시절, 경상도 문경의 깊은 골짜기에 돌석이라는 젊은 나무꾼이 살았더랍니다. 돌석이는 천성이 순박하고 우직하여 제 몸 힘든 줄은 몰라도, 눈먼 홀어머니 조 씨를 봉양하는 일에는 간과 쓸개를 다 내어줄 효자였지요. 어머니는 십수 년 전 몹쓸 열병을 앓은 뒤로 두 눈의 빛을 잃고 두 다리마저 굳어버렸습니다.
돌석의 유일한 소원은 어머니가 세상을 다시 보는 것이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한양에서 용하다는 침의(鍼醫)가 가난한 병자들을 무료로 고쳐준다는 소문이 고을에 돌았습니다. 돌석은 단 하루도 지체할 수 없어, 낡은 무명포로 어머니를 제 몸에 단단히 묶고 천릿길 한양을 향해 길을 나섰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품속에는 남편이 남겨주었다는 녹슨 은비녀 하나가 전부였지요.
"돌석아, 이 비녀는 네 아비가 날더러 목숨처럼 지키라던 것이다. 훗날 우리가 굶어 죽을 지경이 되더라도 이건 함부로 팔면 안 된다."
"염려 마셔요, 어머니. 제 팔다리가 성한데 어찌 어머님의 정표를 팔겠습니까."
험한 고갯마루의 악덕 주모

모자가 천신만고 끝에 새재를 넘어 충청도 땅 어느 주막거리에 닿았을 때는 이미 장대비가 쏟아지는 밤이었습니다. 돌석은 비에 젖어 덜덜 떠는 어머니를 뉘이고자, 불빛이 새어 나오는 주막의 문을 다급히 두드렸지요. 그곳은 심보가 사납고 욕심 많기로 악명 높은 과부 배 씨가 홀로 운영하는 주막이었습니다.
"주모 아주머니, 하룻밤만 처마 밑이라도 빌려주십시오. 돈은 내일 땔나무를 한 짐 가득 해다 바치겠습니다."
배 씨는 문틈으로 비루먹은 모자의 꼴을 훑어보더니 인상을 팍 썼더랍니다.
"돈도 없는 거렁뱅이들이 어디서 굴러들어 와 툇마루를 더럽혀? 냉큼 썩 꺼지지 못해!"
돌석이 무릎을 꿇고 애원하자 어머니 조 씨가 품속을 더듬어 떨리는 손으로 낡은 보따리를 풀었습니다.
"주모, 내 가진 것은 이것뿐이나… 하루만 비를 피하게 해주시구려."
어머니가 꺼내놓은 녹슨 은비녀를 본 배 씨의 눈구멍이 번쩍 뜨였더랍니다. 비록 녹이 슬었으나 은비녀 머리에 새겨진 문양은 보통 여염집의 물건이 아닌, 세도가 집안의 귀한 세공품이었기 때문이지요.
배 씨는 얼굴에 간사한 웃음을 띠며 얼른 은비녀를 낚아챘습니다.
"에구머니, 효성이 갸륵하니 내 특별히 헛간 방이라도 내어주지요. 밥 한 덩이 줄 테니 몸이나 녹이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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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방과 누명
하지만 배 씨의 탐욕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더랍니다. 방에 들어와 은비녀의 녹을 닦아내자, 비녀 안쪽에 가늘게 새겨진 '한양 판서 판결사 심(沈)'이라는 글자가 드러났던 것이지요. 배 씨는 이것이 틀림없이 엄청난 보물이며, 천한 나무꾼 모자가 어딘가에서 훔친 장물이라 지레짐작했습니다.
'이 비녀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저놈들을 관아에 넘겨 포상금까지 챙겨야겠다.'
새벽닭이 울기 전, 배 씨는 헛간으로 달려가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며 가슴을 쥐어뜯었더랍니다.
"도둑이야! 사람 살려! 이 은혜도 모르는 놈들이 내 패물을 훔치고 달아나려 한다!"
잠에서 깬 돌석은 영문도 모른 채 관아의 포졸들에게 포박당하고 말았습니다.
"아닙니다! 나으리, 그 비녀는 저희 어머니의 물건입니다! 저희는 훔치지 않았습니다!"
돌석이 울부짖었으나 배 씨는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놓았지요.
"사또 나으리! 어젯밤 불쌍해서 재워줬더니 제 보물단지에 든 가보 은비녀를 훔쳐 품에 넣더이다! 저 눈먼 노파의 소매를 털어보십시오!"
포졸이 조 씨의 품을 뒤지자 배 씨가 미리 찔러 넣어 둔 엽전 몇 닢이 툭 떨어졌습니다. 고을 사또는 당장 돌석에게 모진 곤장을 치라 명했고, 돌석의 등과 볼기는 피떡이 되어 찢겨 나갔더랍니다.
대반전의 옥사
돌석이 억울하게 옥에 갇히고 어머니 조 씨는 관아 마당 멍석에 내동댕이쳐졌을 때였지요. 때마침 암행을 마치고 한양으로 귀환하던 경기관찰사 심익현이 비를 피해 이 고을 관아에 들렀더랍니다. 관아 마당의 소란을 지켜보던 심 관찰사는 사또가 내놓은 증거물인 은비녀를 보고는 사색이 되었지요.
"사또, 이 비녀를 어디서 압수하였느냐?"
"저기 엎드려 있는 눈먼 노파와 불효막심한 도적놈이 주모의 것을 훔쳤다 하옵니다."
심 관찰사는 떨리는 손으로 은비녀 끝을 잡아당겨 비틀었더랍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은비녀의 머리통이 쑥 빠지며 그 속에서 얇게 접힌 누런 명주 천 한 조각이 튀어나왔지요. 그 천에는 붉은 먹으로 쓴 관찰사 집안의 가계 내력과 인장이 선명히 찍혀 있었습니다.
"네 이년, 주모 배 씨는 똑똑히 듣거라! 이 비녀는 춘천부사를 지내신 내 백부님께서 이십 년 전 난리통에 잃어버린 막내 누이동생에게 건넨 징표다! 비녀의 비밀을 아는 자는 오직 우리 가문의 핏줄뿐이거늘, 네년이 어찌 이것을 네 가보라 우기느냐!"
심 관찰사가 벼락같이 호통치자 배 씨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바닥에 고꾸라졌더랍니다. 심 관찰사는 마당으로 뛰쳐나가 비를 맞고 쓰러져 있던 조 씨 노파의 손을 움켜잡았습니다.
"고모님! 고모님이 정녕 살아계셨습니까! 조카 익현입니다!"
눈먼 어머니 조 씨는 잃어버렸던 집안의 조카 목소리를 알아듣고 오열하였고, 옥에서 풀려나 기어 나온 돌석은 어머니를 끌어안고 피눈물을 흘렸더랍니다.
맺으며
악독한 꾀로 모자를 모함하고 비녀를 빼앗으려던 주모 배 씨는 관을 능멸하고 무고한 백성을 음해한 죄로 볼기 백 대를 맞고 먼 섬으로 유배를 떠났더랍니다. 돌석은 관찰사의 호위를 받으며 비단 꽃가마에 어머니를 태우고 한양의 대저택으로 들어갔고, 어머니는 명의의 치료를 받아 기적처럼 눈을 뜨고 아들의 얼굴을 마주 보게 되었지요. 지극한 효심이 하늘을 감동하게 하고 조상들의 은덕이 피눈물 속에서 꽃을 피운 셈이었더랍니다.
여러분은 길섶에 버려질 뻔했던 비녀 하나가 뒤바꿔놓은 이 기적 같은 혈육의 상봉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밤마다 서당 훈장의 방을 찾아와 묵묵히 먹을 갈고 사라지던 의문의 하얀 손.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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