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새는 오두막 영의정에게 놋쇠 솥을 도둑맞은 사또의 기막힌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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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시절, 경기도 시흥 고을의 허물어져 가는 초가삼간 안방에는 빗물이 줄줄 새고 있었더랍니다. 흙벽은 툭 치면 와르르 무너질 듯 위태로웠고, 방고래가 다 내려앉아 냉골이 된 방 한구석에서 웬 늙은이가 낡은 짚신을 삼고 있었습니다.
누더기 옷을 걸치고 짚풀을 엮는 그 노인은 바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라 불리는 의정부 영의정, 오리(梧里) 이원익 대감이었지요.
비 새는 오두막의 늙은 재상

이원익 대감은 세 번이나 정승의 반열에 오른 거물이었으나, 그의 살림살이는 산골 숯쟁이보다도 변변치 못했습니다. 고을 백성들은 그가 벼슬을 사양하고 낙향할 때마다 머무는 그 집을 보고 혀를 내둘렀지요.
어느 날 늙은 하인 갑돌이가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찌그러진 바가지를 받치며 탄식했습니다.
"대감마님, 마포나루에 있는 벼슬아치들은 으리으리한 기와집을 짓고 사는데, 명색이 영의정 어른께서 어찌 이런 썩은 짚더미 밑에서 밤을 지새우십니까?"
이원익은 싱긋 웃으며 짚단을 바싹 잡아당겼습니다.
"비가 새면 바가지를 대면 되고, 바람이 들이치면 볏짚으로 문틈을 막으면 그만이다. 비바람을 가릴 지붕이 아예 없는 백성들에 비하면 내 집은 대궐이나 진배없지 않느냐."
이 무렵, 시흥 고을에 새로 부임한 현감 배무덕은 소문난 탐관오리였습니다. 그는 한양 요직으로 줄을 대기 위해 권세가들에게 뇌물을 뿌릴 궁리만 하던 위인이었지요.
도둑맞은 놋쇠 솥과 탐관오리의 술수

배무덕은 전임 영의정이 자기 관할구역 오두막에 산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잔뜩 긴장했더랍니다. 그러나 직접 몰래 찾아가 쓰러져 가는 초가를 엿보고는 코웃음을 쳤지요.
"허울만 좋은 늙은이로군. 임금께 버림받아 굶어 죽기 직전인 늙은 정승 놈에게 신경 쓸 것 없다!"
배 현감은 곧바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기 시작했습니다. 공납으로 바칠 곡식을 두 배로 걷고, 말을 듣지 않는 백성은 무자비하게 곤장을 쳤지요. 그중에서도 대장간을 하던 노인에게서 대대로 내려오던 귀한 백년 묵은 명품 놋쇠 솥을 억지로 빼앗아 제 동헌 안채에 들여놓았습니다.
"사또 나리, 그 놋쇠 솥은 저희 집 가보이자 밥줄이옵니다. 제발 돌려주십시오!"
대장장이가 피눈물을 흘리며 엎드렸으나, 배 현감은 비열하게 웃으며 관노들을 시켜 그를 내동댕이쳤습니다.
"천한 놈이 어디서 감히 명품 놋솥을 탐내느냐? 국고에 귀속시킬 물건이니 썩 물러가라!"
그런데 며칠 뒤 한밤중, 관아에 괴한이 들어 그 무겁고 거대한 놋쇠 솥만 감쪽같이 사라지는 해괴한 도둑질이 일어났습니다. 도둑은 기이하게도 솥이 있던 자리에 낡아빠진 짚신 한 짝만을 덩그러니 남겨두고 달아났지요.
사또의 분노와 짚신의 주인
발칵 뒤집힌 관아에서 배 현감은 길길이 날뛰었습니다.
"관아에 도둑이 들다니! 샅샅이 뒤져서 그 발칙한 도둑놈을 당장 끌고 오너라!"
배 현감이 씩씩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짚신을 집어 들었을 때였습니다. 곁에 있던 이방이 짚신 코에 박힌 푸른 삼베 조각을 보더니 사색이 되어 중얼거렸습니다.
"사또, 이 짚신은… 보통 물건이 아닙니다. 얼마 전 볏짚 틈에 푸른 삼베를 꼬아 신발을 삼던 자가 딱 한 명 있었습니다."
"누구냐? 그놈이 감히 관아의 보물을 훔쳐가?!"
"저기 산기슭 비 새는 초가에 사는… 오리 대감입니다요."
배 현감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허허, 그 가난뱅이 정승 늙은이가 먹고살기 힘들어 결국 좀도둑질까지 손을 댔구나! 제아무리 정승이라 한들 관아의 물건을 훔친 현행범이라면 임금이라도 감싸지 못할 터. 이번 기회에 그 늙은이를 엮어 한양 실세들에게 내 충성심을 보여주리라!"
눈이 뒤집힌 배 현감은 포졸 수십 명을 거느리고 단숨에 이원익의 오두막으로 들이닥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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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한가운데 걸린 솥
"안에 아무도 없느냐! 죄인을 체포하러 왔다!"
포졸들이 사립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마당 한가운데서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배 현감이 애지중지하던 바로 그 놋쇠 솥이 떡하니 걸려 있었고, 구수한 보리죽이 펄펄 끓고 있었지요.
그 옆에서는 이원익이 짚신 한 짝만 신은 채, 솥뚜껑을 열고 주걱으로 죽을 젓고 있었습니다.
배 현감이 득의양양하게 소리쳤습니다.
"네 이놈! 명색이 재상이라는 자가 관아에 침입해 내 놋쇠 솥을 도둑질해 죽을 끓여 처먹고 있었더냐! 이 짚신 한 짝이 관아에 떨어져 있었거늘, 무슨 말로 변명할 테냐!"
포졸들이 당장 오랏줄을 들이대려 하자, 이원익은 태연한 낯빛으로 주걱을 내려놓았습니다.
"도둑질이라니, 당치 않다. 나는 관아의 물건을 훔친 것이 아니라, 주인을 잃고 통곡하던 백성의 피땀을 잠시 빌려왔을 뿐이다."
"궤변을 늘어놓지 마라! 이 솥은 내가 엄연히 관리하던 관청의 기물이다!"
배 현감이 길길이 날뛰자 이원익이 낡은 소맷자락을 걷어 올리며 허허 웃었습니다.
"배 현감, 자네는 이 솥 밑바닥에 무엇이 새겨져 있는지 아직도 확인하지 않았는가 보군."
솥바닥에 새겨진 비밀
"솥바닥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배 현감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불길을 피해 솥 안쪽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보리죽이 끓어 넘치는 솥의 안쪽 테두리에는 놀랍게도 어명(御命)을 뜻하는 붉은 먹선의 흔적과 함께, '선조대왕 하사(宣祖大王 下賜)'라는 글자가 또렷이 음각되어 있었습니다.
배 현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이원익이 나지막하지만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말했지요.
"임진왜란 시절, 왜군을 막기 위해 철을 벼리던 저 장인의 선친에게 선조대왕께서 친히 은혜를 기리며 하사하신 어사품(御賜品)이다. 대대로 나라의 공을 기리라 준 물건을, 일개 현감이 무력으로 빼앗아 제 사리사욕을 채우려 안채에 숨겨두었더냐?"
"그, 그것이 어찌…!"
배 현감의 혀가 굳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원익은 품속에서 낡은 서찰 한 통을 꺼내 들었습니다.
"내가 짚신을 삼으며 조용히 지내니 눈에 뵈는 것이 없었던 모양이구나. 주상전하께서 내게 암행의 권한과 함께 경기 남부의 탐관오리를 징치하라 내리신 비밀 교지다."
그 순간 사립문 밖에서 암행어사의 수행원들과 금군들이 들이닥쳐 배 현감과 포졸들을 꼼짝달싹 못 하게 에워쌌습니다.
탐관오리의 몰락과 따뜻한 죽 한 사발
배 현감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사시나무 떨듯 떨며 이마를 땅에 찧었습니다.
"대감마님!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제가 눈이 멀어 어사품인 줄도 모르고 그만 망발을 부렸습니다!"
이원익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굽어보았습니다.
"백성의 피눈물을 짜내어 제 배를 불리고, 선왕의 은덕까지 욕보인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 저놈의 관복을 벗기고 포박하여 즉시 한양 의금부로 압송하라!"
사또가 끌려가자마자 마당 밖에서 숨죽여 지켜보던 마을 백성들과 대장간 노인이 우르르 달려와 눈물을 흘리며 엎드렸습니다. 이원익은 대장장이의 손을 잡으며 놋쇠 솥을 돌려주었습니다.
"임금의 뜻이 담긴 네 가보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어서 가져가 다시는 빼앗기지 말거라."
그리고는 가마솥에 남은 따뜻한 보리죽을 굶주린 백성들에게 한 그릇씩 손수 퍼주었지요. 비가 들이치는 낡은 처마 밑이었지만, 그날 오두막 마당에는 세상 어느 대궐보다 따스한 훈기가 가득했더랍니다.
맺으며
허름한 초가삼간에서 짚신을 삼던 정승의 맑은 지혜는 백성을 짓밟던 탐욕스러운 관리를 단숨에 꺾어버렸습니다. 비가 새는 방에서도 백성의 눈물을 먼저 닦아주던 참된 어른의 풍모는 지금까지도 깊은 울림을 남기지요. 여러분의 고향에도 이처럼 욕심 많은 관리를 호통치며 백성을 구한 지혜로운 어사의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한밤중 무덤가에서 은비녀를 파내던 효자의 등 뒤로 붉은 눈의 여인이 나타난 까닭은?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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