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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 밤 폐사당의 붉은 궤짝과 백 냥을 훔치려다 들통난 이방의 흉계

지은미소 2026. 10. 19.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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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비가 산천을 집어삼킬 듯 쏟아붓던 그믐밤, 천둥소리에 산천초목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습니다. 산길 한가운데서 길을 잃은 나그네의 눈앞에 덩그러니 나타난 것은, 현판조차 썩어 문드러진 기와집 한 채였지요.

마을 사람들이 '귀신 나오는 사당'이라 부르며 대낮에도 얼씬하지 않던 폐사당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습니다. 빗물에 젖은 짚신을 질질 끌며 사당 안으로 들어선 사내의 눈빛은, 그러나 귀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차분하기만 했더랍니다.

비바람을 피해 든 불청객

이 사내의 이름은 조원석, 강원도 삼척 땅의 가난한 몰락 양반이었습니다. 효성이 지극하던 그는 몹쓸 병에 걸린 노모의 약값을 구하고자 천 리 먼 길을 걸어 한양으로 가던 참이었지요. 그의 품에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낡은 흑각단도 한 자루와 어머니의 탕약값으로 쓰려던 엽전 열 닢이 전부였습니다.

"하필 이런 궂은날에 발이 묶이다니, 내일 장시가 열리기 전에 당도해야 하거늘."

원석은 젖은 옷을 짜내며 사당 마루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사당 안은 흙먼지와 거미줄로 뒤덮여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지요. 그런데 위패가 놓여 있어야 할 제단 아래, 유독 먼지 하나 없이 반들반들한 붉은 옻칠 궤짝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궁금증이 일었으나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지 않는 성정이라, 원석은 벽에 기대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려 했습니다. 바로 그때, 닫혀 있던 사당 문이 벌컥 열리며 사내 둘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들이닥쳤습니다.

한밤중에 모여든 그림자들

"허 참,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구먼! 이방 나리, 약조한 물건은 제자리에 잘 있겠지요?"

거적때기를 뒤집어쓴 사내가 털푸덕 주저앉으며 묻자, 비단 도포를 걸친 배 나온 사내가 헛기침을 내뱉었습니다. 그는 바로 이 고을 정선 관아에서 재물을 주무르며 악명이 자자하던 손 이방이었습니다. 손 이방은 탐욕이 끝이 없어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기로 유명한 자였지요.

"이놈아, 목소리를 낮추어라. 관아 옥사에 갇힌 역적의 잔당들이 남겨둔 뇌물 백 냥이다. 사또 녀석의 눈을 피해 내 진작 이 폐사당 궤짝에 감춰두었지."

손 이방의 번들거리는 눈통자가 어둠 속에서 번뜩였습니다. 그들은 어두운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원석을 보지 못한 채, 제단 밑의 붉은 궤짝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이 돈만 챙겨 야반도주하면 내 평생 호의호식할 터. 어서 궤짝을 열어라!"

손 이방이 궤짝 자물쇠를 부수려 철퇴를 치켜든 그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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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궤짝 속에서 나온 것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궤짝 뚜껑이 박살 나며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번쩍이는 은괴나 엽전 꾸러미가 아니었습니다.

"크악! 이, 이게 도대체 무엇이냐!"

손 이방을 따르던 하수인이 기겁하며 뒤로 나자빠졌습니다. 궤짝 안에서 덜컥 튀어나온 것은 다름 아닌 피 묻은 하얀 소복과, 누군가의 목을 벤 듯 시퍼렇게 녹이 슨 관아의 포도포졸 환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옷자락 위에는 붉은 피로 '살인자 손형택'이라 적힌 혈서가 놓여 있었지요.

"네, 네놈이 어찌 이것을… 아니, 분명 3년 전에 깊은 연못에 던져 버렸거늘!"

손 이방은 사시나무 떨듯 떨며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3년 전, 자신의 횡령을 눈치채고 암행어사에게 고변하려던 청렴한 전임 사또를 살해하고 연못에 빠뜨렸던 바로 그 증거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때, 어둠 속에서 조원석이 묵직한 걸음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손형택, 네놈의 죄가 하늘에 닿아 오늘 밤 스스로 무덤을 파러 왔구나."

어둠을 가른 단도와 진실

손 이방은 낯선 길손의 등장에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이내 흉악한 얼굴로 품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습니다.

"어떤 놈이냐! 네놈이 이 흉계를 꾸몄더냐? 이 사실을 안 놈은 살려 보낼 수 없다!"

손 이방과 하수인이 단도를 겨누며 원석에게 달려들었습니다. 하지만 원석은 당황하지 않고 품속의 흑각단도를 뽑아 들고 날렵하게 몸을 비틀었습니다. 챙강! 하는 맑은 쇠 소리와 함께 손 이방의 칼이 허공으로 튕겨 나갔지요.

원석은 어릴 적 무과를 준비했던 터라 무예에 뛰어난 솜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하수인의 턱을 걷어차 기절시킨 원석은 손 이방의 목덜미를 낚아채 바닥에 메쳤습니다.

"사, 살려주시오! 대체 뉘시오? 그 궤짝 속의 물건은 내가 넣은 것이 아니오!"

바닥을 기며 변명하는 손 이방의 면전에, 원석은 허리춤에서 마패를 꺼내 달빛 아래 번쩍 비추어 보였습니다.

"어명을 받든 암행어사 조원석이다. 몰락 양반 행세를 하며 네놈의 뒤를 밟은 지 석 달이다. 네놈이 빼돌린 뇌물 백 냥은 이미 어제 낮에 내 관원들을 시켜 관아 창고로 옮겨두었고, 네놈의 죗값을 물을 옛 증거를 이 궤짝에 채워 넣었지."

손 이방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습니다. 애초에 버려진 사당으로 비를 피해 들어온 불쌍한 길손 따위는 없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은 탐욕에 눈이 멀어 제 발로 증거를 찾아오게 만든 조원석의 치밀한 올가미였습니다.

맺으며

이튿날 날이 밝자 손 이방과 그 무리는 오라줄에 묶여 한양 의금부로 압송되었고, 억울하게 죽은 전임 사또의 원혼도 비로소 한을 풀게 되었습니다. 원석은 손 이방이 은닉했던 재물 중 부정한 쌀 수백 석을 헐벗은 삼척과 정선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 준 뒤 다시 홀연히 길을 떠났더랍니다.

비바람 치는 밤, 버려진 사당에서 제 발로 파놓은 함정에 빠진 악인의 최후가 참으로 통쾌하지 않습니까? 혹여 여러분도 인적 드문 길섶 폐가에서 기이한 궤짝을 마주쳤다는 기괴한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다음 이야기 예고: 깊은 산골 주막의 주모가 손님들의 국밥에 매일 밤 넣던 기괴한 풀잎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 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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